[국사/중국사]공녀 헌납의 배경과 전개, 여파 및 폐단
- 최초 등록일
- 2006.04.03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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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사와 중국사에 나오는 공녀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공녀 헌납의 배경과 전개, 여파 및 폐단을 조사하였습니다.
목차
Ⅰ. 공녀 헌납의 배경
Ⅱ. 공녀 선발 과정 및 이에 따른 폐단
Ⅲ. 공녀들이 끌려간 길
Ⅳ. 당시 공녀 헌납 실태
Ⅴ. 중국으로 간 공녀의 운명
Ⅵ. 공녀 헌납의 여파
본문내용
Ⅰ. 공녀 헌납의 배경
(1) 당시의 외교적 상황
삼국시대 이래 한국과 중국과의 외교관계는 조공외교 속국(屬國)이나 제후(諸侯)가 종주국(宗主國)에 공물(貢物)을 바침으로써 이루어지는 물물의 교역(交易) 관계
를 특징으로 한다. 한국과 중국만의 특징이라고 하기보다는 동아시아 외교 전체의 하나의 흐름이었다.
조공관계는 그 성격에 따라 크게 전형적 조공관계, 준조공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형적 조공관계는 종주국과 종속국 관계에 행해지는 것이었으나, 준조공관계는 이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선은 전형적 조공관계의 공물 중 특수한 것으로 노비·여자 등을 보냈다.
삼국시대 전반기에는 준조공관계가 주를, 삼국시대 후반기에는 두 관계 모두가 나타났으나 고려말기부터 전형적인 조공관계가 강화되면서 공녀의 문제가 커지게 되었다. 즉 공녀 문제는 바로 이러한 전형적인 조공관계에서 형성된 불합리한 문제로 파악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전의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조선 또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정치적 목적 때문에 조공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지배자의 위치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이 당시 관료 사이에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2) 공녀 헌납의 발단
조선시대 공녀 문제의 발단은 전형적 조공관계가 강화된 고려말기에서 찾을 수 있다.
1225년(고종 12)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피살된 저고여 피살사건 이후, 몽골은 이를 구실로 고려에 침입하여, 항복 조건으로 고려의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500명씩을 바치라고 하였다.
몽골은 국호(國號)를 원(元)이라 고친 후에도, 계속해서 고려에 공녀를 요구하였다. 원의 공녀 요구 이유는 복속정책(服屬政策), 또는 원과 고려의 친근정책(親近政策) 때문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원나라 왕실에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1. 서적
공녀-중국으로 끌려간 우리 여인들의 역사(정구선, 국학자료원, 2002)
2. 인터넷 사이트
이종룡과 함께 하는 우리 역사(http://dugok.x-y.net)
내일을 여는 역사(http://cont111.edunet4u.net/2002/yjsgun11/Mm/Module/inde-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