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공민왕의 개혁정치
- 최초 등록일
- 2006.04.04
- 최종 저작일
- 2005.04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할인쿠폰받기](/images/v4/document/ico_det_coupon.gif)
소개글
전공 레포트였는데..쉬운 내용이니 교양으로 사용하시면 좋을듯..
목차
Ⅰ. 서론
Ⅱ. 공민왕의 반원정치
1. 공민왕의 즉위와 조일신의 난
2. 부원세력의 숙청과 반원정치의 전개
3. 공민왕의 관제개편
Ⅲ. 신돈의 집권과 실각
1. 신돈의 집권 배경
2. 신돈의 개혁정치
3. 신돈의 실각
Ⅳ.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충렬왕 이래로 고려는 원의 속국으로 격하되어 정치에 있어 원의 간섭을 지나칠 정도로 받아야 했고, 왕조차도 원 정부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강제로 압송 당하거나 구금당하는, 그야말로 국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상황을 맞았다. 이렇게 원 조정에서 고려를 좌지우지하자 부원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즉위한 공민왕은 반원적인 개혁정치를 실시하게 된다. 그 과정 중 부원세력과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는 등 난관들에도 봉착하게 된다.
본고에서는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 속에 부원세력의 저항과 숙청, 그리고 신돈이라는 인물을 등용하면서 실시된 개혁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공민왕의 즉위와 조일신의 난
공민왕이 국왕에 즉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난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충혜왕 사후 그는 국왕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조카가 되는 충목왕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는 원 공주의 소생이 아닌 명덕태후 홍씨의 소생인 때문이었다. 충목왕 사후에도 이제현, 이승로 등이 그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충정왕에게 왕위를 내주고 말았다. 그는 결국 원 조정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고, 꾸준히 원 조정과 교섭하여 결국 원 조정으로부터 국왕 임명을 받아냈다. 원에서 宿衛하면서 원의 쇠퇴 과정을 지켜본 공민왕은 즉위한 이듬해 1월에 호복, 변발을 풀었다. 2월에는 인사권을 전단하던 政房을 폐지하였는데, 당시 정방은 원의 倖臣들에게 관직을 주던, 일종의 청탁기관이 되어 있었다. 이 정방의 폐지는 조일신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개혁 의지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은 초기부터 벽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해 9월에 일어난 조일신의 난은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참고 자료
․정인지, 북한 고전 연구실 역, 『고려사』. 서울, 신서원, 1991.
․민현구,「高麗 恭愍王의 反元的 改革政治에 對한 一考察 - 背景과 發端 -」,『震 檀學報』68, 1989.
․주석환,「辛旽의 執權과 失脚」.『史叢』30, 고려대학교 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