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삼국시대 신라토기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6.04.30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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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시대 신라토기에 대하여 시대별로 분류하고 제작기법, 특징, 미술사적 의의를 1page로 정리하였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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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우리가 무심코 밟고 다니는 전돌에까지 무늬를 새겨 넣을 정도로 문화의 부흥기를 이룬 삼국시대에는 토기도 다양한 기형과 무늬를 가지며 일상생활 속으로 깊게 들어와 있었다. 삼국이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도 독자적인 도기문화를 형성하던 이 시기의 신라 토기는 그 양적인 면에서도 방대할 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 찬란한 황금문물만이 아닌 한국 도자기의 발달과 공예적 가치를 높인 신라인들의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350~450년경의 신라의 대표적 고분양식인 경주 황남동이나 황오동 등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신라 토기의 전형인 창과 덮개가 있는 굽다리접시·파배·기대 등 많은 양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서봉총·천마총 등 500년을 전후한 1세기 동안의 고분에서는 소량의 토기만이 매장되어 있었으며 토기 자체도 기대 ·파배 등이 소멸하고 용기로서의 본래 기능보단 외관에 중점을 두는 의기화 되는 경향을 보였다. 600년을 전후해서는 돌방무덤이 등장하고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증가하면서 고분에 부장되는 토기가 크게 줄고, 형태상으로도 굽다리접시와 목항아리가 계속 주류를 이루고는 있지는 통일신라 토기로의 과도기적인 양식이 크게 나타난다.
밀폐된 가마에서 태토 속의 철분이 환원염으로 구워진 회백색·회흑색의 광택이 없는 경도가 주류를 이루는 신라 토기는 백제나 가야토기와 제작기법 상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고운 태토를 1000℃이상의 고열에서 소성하여 두드리면 금속성 소리가 날 정도의 경도를 가지며 유약을 입히지 않아 흡수성이 완전하게 제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간혹 소성 도중 재가 기표에 떨어져 자연유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물레를 사용함으로써 벽이 얇아지고 모양 제작이 용이해져 항아리·병·잔·굽다리접시·그릇 등 종류가 풍부해졌으며, 꾸밈새 없는 질감에 음각으로 파상문·삼각문 등의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기마인물형 토기나 압형토기, 토우, 기면에 인물이나 동물을 붙인 부장용 등의 명기류도 많이 제작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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