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근대사]원제국의 대외관계-쿠빌라이의 대외정벌
- 최초 등록일
- 2006.05.01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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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원제국의 대외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 부분 자료가 부족한데 최대한 많은 자료를 참고한 것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원제국의 성립
(1) 쿠빌라이와 원의 건국
(2) 남송 정벌
3. 쿠빌라이의 마지막 다섯 차례 정벌
(1) 고려와의 관계
(2) 일본정벌
(3) 동남아 정벌
(4) 극한에 이른 몽골의 무력
4. 원대의 동서 문물 교류
5.맺음말
본문내용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남송이 아직 멸망하기 전인 1274년 원정에서는 고려가 그 기지가 되었다. 몽골과 고려의 연합함대는 약 800척의 크고 작은 전함에 양국의 군사 2만 5,000여 명을 태우고 일본으로 진격했다. 일본 연안에 있는 몇 개의 작은 섬을 점령한 후, 그들은 11월 20일 규슈의 하카타 만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이미 참호를 파서 수비태세를 철저히 갖추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여원 침공군은 그간 주로 대륙에서 상당한 국제전 경험을 쌓은 베테랑급으로 당연히 장비도 좋은 편이었으므로 일본측의 낭패가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천리 밖에 나온 군사는 누구도 당해내지 못한다 하여 승부가 나지 않는 싸움을 계속 하지 않고 일단 철수했다. 밤이 되자 태풍이 원정군의 함대를 휩쓸어버렸다. 몽골군의 철수 결정은 대혼란이 일으켰고, 훗날 고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예기치 않은 철수로 인해 적어도 1만 3,000명 이상이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고 한다.
1차 원정이 실패한 이후 원 세조는 원정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본에 선유사(宣諭使)를 파견하는 한편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남송(南宋)을 정복한 직후인 1279년부터 일본원정을 준비했다. 그동안 원의 일본 초유나 원정에 대해 소극적이던 고려는 적극적으로 원정 계획에 참여했다. 특히 충렬왕은 일본원정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고려에 파견되어 있던 홍다구 등의 부원세력(附元勢力)을 축출하고 자신의 측근세력을 육성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결과 고려는 병선 900척, 초공, 수수 1만 5,000명, 정군(正軍) 1만 명, 병량(兵糧) 11만 석, 그밖의 많은 병기들을 동원하는 등 1차 원정 때보다 훨씬 많은 인적·물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 한편 원도 3만 명의 몽한군 이외에 멸망한 남송의 군대 10만 명을 더 동원해 1차 원정 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다.
참고 자료
레이 황, 《중국, 그 거대한 행보》, 경당, 2002
백양, 《맨얼굴의 중국사4》, 창해, 2005
이춘식, 《중국사서설》, 교보문고, 2005
정성환, 《인물로 보는 중국역사4》, 신원문화사, 1994
장문평, 〈여.원(麗.元)의 일본원정〉, 《軍史17》,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