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왕건과 훈요십조
- 최초 등록일
- 2006.05.02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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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왕건과 훈요십조
사학과 전공리포트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후삼국 통일 과정으로 본 왕건
(2) 통일 후 왕건의 정책
(3) 훈요십조의 내용
(4) 훈요십조를 통해 본 고려의 성격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몇 년 전 ‘태조 왕건’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었는데, 후삼국의 정세와 통일국가 고려의 건국을 다룬 그 드라마는 왕건을 카리스마적이고 모든 것을 잘하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왕건은 역사 속에서도 카리스마적이고 완벽하였을까? 그리고 그가 후대왕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왕건이 원하는 고려의 성격을 어떠하였으며 그것은 고려사회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우리는 왕건의 생애와 정책 그리고 훈요십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훈요십조를 통해 본 고려의 성격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Ⅱ. 본론
(1) 왕건의 생애와 정책
왕건이 청년으로 성장한 900년 전후의 한반도는 극도의 혼란기였으며, 신라의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재정이 바닥나 백성들에게 무리한 세금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자 농민들은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이런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라를 세운 이가 바로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892년 5000명의 병사로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여 왕을 칭하고 전라도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국호를 후백제라 정하고 도읍을 완산주(지금의 전주)로 정하였다. 한편, 궁예는 신라의 왕족출신이다. 정권경쟁에서 밀려나서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가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환속하여 기훤, 양길등의 밑에서 일하다 독자세력을 형성하여 철원을 기점으로 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때 왕건 부자가 궁예의 밑으로 들어오고 왕건 부자의 합류로 세력이 커진 궁예는 송악에 거점을 잡고 901년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여 나라를 세웠다. 그 후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905년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으며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후삼국은 성립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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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역사스페셜 『역사스페셜2』, 효형출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