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이승만
- 최초 등록일
- 2006.05.02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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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승만의 생애를 소개하고 그의 독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사건인 마산의거에 중점을 두어 독재자 이승만이라는 시각으로서 그를 바라보고 평가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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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승만의 생애를 소개하고 그의 독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사건인 마산의거에 중점을 두어 독재자 이승만이라는 시각으로서 그를 바라보고 평가하고자 합니다.
그는 조선 말년 1875년 고종12년때 황해도 편산에서 명문대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조 제 3대 왕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그의 출생일은 우연하게도 한반도의 풍운을 내포한 일본 순함 운양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아군의 발포를 받은 소위 운양호사건이 돌발한 불길의 날이었으니, 이것이 이승만 전 생애에 영향을 주지 아니하였는가도 사료된다. 그 후 90년간 한국에서 야기된 모든 사사건건이 이승만의 생애에 그림자와 같이 동반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3세 때 가족이 산간 벽촌에서 서울로 이주하게 된 것은 그의 전도 개척의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 가정의 도시 생활이 그로 하여금 한국의 첫 철학박사,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 한국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직접 원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학업에 수재였다. 동시에 근면과 노력을 다하는 정력가였다. 특히 어학에 취미와 재간이 있어 영어에도 상당한 실력을 배양하였고, 외국 선교사들과도 많이 접촉하였다. 한때는 국어교사가 된 일도 있었다.
이승만의 청소년시대에는 한국이 외침내환으로 누란의 위험을 벗어날 수 없는 국난이 극도로 격화하고 있었다. 일본, 청국, 러시아 등 3국의 한국 침략이 그 극에 달하여 마치 아프리카 벌판에서 맹수들이 포획물을 뜯어 먹느라고 야단치는 장면과 비슷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정의 몰지각한 정부 탐관오리들을 구습에 젖어 매관매직과 부정축재에 몰두함으로써 국가가 위기일발에 처해있는 실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구미유학 또는 일본시찰 등에서 신지식을 배운 소수 혁신파의 무능한 정치에 대한 개혁운동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동학혁명․ 갑신정변․ 독립협회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승만도 이 개혁운동에 합류한 청년 개혁운동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유학시절에도 부지런히 미국 종교인, 학자,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인을 따라 다니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였다.
다음으로 이승만의 개인성격 내지 정치적 성격을 알수 있는 사건 두 가지가 있다.
그는 1905년 그당시 대통령인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막아 달라고 하는 호소문을 제출한 바가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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