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사상]조선 중기의 유학사상
- 최초 등록일
- 2006.05.17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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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중기의 유학사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저의 자료 고려 부터 조선 후기까지의 사상이 다있습니다.
목차
Ⅰ. 학파의 분화
Ⅱ. 이기철학의 발달과 전승
Ⅲ. 17세기 성리학의 추세
1. 율곡학파
2. 퇴계학파
3. 퇴율절충론
Ⅳ. 존주론과 명분주의
본문내용
성리학이 그 이해의 심도를 더하여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 것은 조선 중기의 명종, 선조대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성리학적 질서와 가치관이 민간에까지 보편화될 뿐 아니라 성리학에 밝은 많은 학자들이 등장하여 이론적으로도 확고한 틀을 갖추게 된다. 조선성리학의 확립기에 해당되는 이 시기의 이름난 유학자들을 보면 명종대의 晦齋 李彦迪과 花潭 徐敬德을 선구로 하여 영남에는 退溪 李滉, 南冥 曺植이 있었고 호남에는 一齋 李恒, 河西 金仁厚, 高峰 奇大升, 眉巖 柳希春 등이 있었으며 경기에는 蘇齋 盧守愼, 龜峰 宋翼弼, 栗谷 李珥, 牛溪 成渾 등이 있었다. 이들 유학자들의 지역적인 분포만 보아도 당시 성리학의 보편화 정도를 알 수 있다. 이들 유학자들은 각기 일가를 이루어 이후 조선 성리학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에서도 퇴계와 율곡의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퇴계에 의해서 주자학 중심의 성리학으로 조선성리학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이미 양명학을 비롯한 非程朱的 사상은 비판받기 시작했고 이 때 이미 조선성리학은 교조적인 배타성을 띠고 시작되었다 하겠다. 조선 중기 이후 성립되기 시작한 각 학파는 이러한 주자학의 배타성 위에서 각기 자기학파가 주자학의 정통임을 내세우면서 분파를 형성해갔다. 그리고 각 학파간에는 주자학에 대한 태도나 해석의 차이로 말미암아 학문적으로 대립하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당파와 결합됨으로써 학문적 대립은 정치적인 대립으로 바뀌어 상대방의 학설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판으로 일관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자학의 해석이 한층 치밀해지고 조선 전기의 주자학 해석이 지녔던 논리적 난점이 재검토되면서 새로운 성리학 조류를 형성해 나가게 된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학파라고 부를 수 있는 학자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학문적 특색이 뚜렷하고 학문집단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학파로는 화담학파, 남명학파, 퇴계학파, 율곡학파를 들 수 있다. 이 중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성립한 학파는 화담학파이다. 일찍이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화담에 은거하여 독창적인 기일원론에 입각한 성리설을 전개하고 강학에 종사한 서경덕과 그의 문인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