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광개토 왕릉비의 검토
- 최초 등록일
- 2006.05.19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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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표수업을 위해 쓴 레폿입니다. 교수님이 까다로운 수업이라서 건성건성 할 수 없었죠.. 엄청 신경써서 쓴 레폿입니다. 그랬던 만큼.. 당연 결과는 좋았죠.. 많은 자료를 참고해서 정리한 만큼.. 교수님께 정리가 깔끔하고 잘되어 있다고 칭찬도 들었습니다. ^^
목차
1. 능비의 현상
(1) 능비의 개요
(2) 능비의 재발견
(3)비문의 탁본과 조사
2. 비문 변조설의 진위
3. 비문의 내용
4. 신묘년 기사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5. 신묘년조의 해석과 소결론
맺음말
■ 참고 ■
본문내용
1. 능비의 현상
(1) 능비의 개요
광개토왕릉비는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해 왕이 죽은 후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3년 9월에 왕릉과 함께 국내성 동쪽 언덕(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대비가)에 세워진 사면석비로 당대 고구려문화를 대표하는 기념비이다.
능비는 동쪽으로 45도 정도 치우친 동남향에서 서북방 방향으로 서 있는 데, 대석과 비신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대석은 약 20cm 두께의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은 것으로 길이 3.35m 너비 2.75m의 크기인 데, 현재 3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깨어져 나갔다. 비신은 우리가 흔히 보는 화강암이 아니라 방주형의 현무암질 화산암(종래에는 응회암으로 보았다.)에 약간의 인공을 가한 것으로, 너비 1.35 ~2.0m 높이 6.39m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크기이며, 개석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로 되어 있다.
비신의 4면에 모두 문자가 새겨져 있는 사면환각비인데, 대체로 5.5m높이에서부터 비문을 조각하기 시작하였으며,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면의 위와 아래에는 횡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cm간격으로 가는 종선을 그었다. 여기에 한(漢)의 예서(隸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0-15cm 정도 크기의 모두 44행 1,775자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어 중원고구려비와 더불어 당대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밝혀주는 최고의 금석사료로 평가된다.
특히, 한국고대사의 경우 당대의 문헌 사료를 갖고 있지 못하여 미해결의 장으로 남겨진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사는 물론 한국고대사의 발전과정을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자료라고 할 것이다.
(2) 능비의 재발견
그러나 능비는 평양천도로 서서히 잊혀져 가다가 고구려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만주의 옛 땅과 더불어 역사의 비밀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후 능비의 존재가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여말선초 때이다. 세종대에 편찬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39,註解)}에는 공민왕 19년(1370)에 있었던 태조 이성계의 우라산성(于羅山城:지금의 오녀산성)공략을 칭송한 노래에서 집안지방에 황성(皇城)이 있으며 그 북쪽 7리 되는 곳에 비가 있다고 기록하여 처음으로 능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이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문헌들에 능비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으나, 여진족의 유적으로 오인하였을 뿐 이를 광개토대왕의 기념비로 인식했던 것은 아니었다.
참고 자료
임기환,「100년 동안의 논쟁, 광개토왕릉비」,『고대로부터의 통신(금석문으로 한국고대사 읽기)』,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엮음, 푸른역사, 2004.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광개토왕릉비는 변조되었는가」,『한국고대사 산책』,역사비평사, 2002.
서영수,논문「광개토대왕비의 진실은 무엇인가」,단국대 사학과(http://user.chollian.net/~toa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