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에 대해서 그의 생애, 업적, 실학자적 가치관 등을 중심으로 분석한 레포트입니다.유득공을 전체적으로 알기에도, <발해고>의 유득공만 알기에도 좋습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유득공의 생애
3. 유득공의 관료생활
4. 유득공의 색다른 시각
1) 발합경
2)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3)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5. 유득공의 역사인식
1) 이십일도회고시
2) 발해고
3) 사군지
6. 마치며
본문내용
6. 마치며
이상으로 실학자 유득공의 생애와 그의 수령으로서의 모습, 관심사 및 역사관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는 문학에 있어서 매우 탁월했다. 형식주의에 빠진 당시의 시풍과는 대조적으로 간결한 시풍을 유지함으로써 시중에 소위 검서체(檢書體)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덕무는 벗이었던 유득공에게 서울에는 온갖 수선공이 있어 흠집난 물건을 고치니 우리도 서울에서 파시(破詩)를 고치라고 외쳐서 술과 안주를 얻어먹자고도 한다. 그 후 『한객건연집』이 청에서 명망을 얻을 때, 중국의 문인 반정균은 유득공의 시를 보고 “유득공의 시는 재주와 깊이가 있고 정취가 풍부하며 품격과 율조가 도도해서 검푸른 바다 속의 고래를 끌어당길 솜씨가 있다”고 극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를 “죽지 ․ 궁사 ․ 영사 등 여러 가지 시체의 좋은 점을 겸했으므로 반드시 전수해야 할 작품이다”라고 칭송한 적도 있다.
또한 유득공은 역사인식에서도 탁월한 면을 보여준다. 역사가로서 그의 인식은 초기에 남방 중심의 역사인식에서 시작하여 나중에 북방 중심의 역사인식으로 변모해 갔으니, 그 결과 나타난 『발해고』와 『사군지』는 그로 하여금 한국사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발해고』를 저술하였고,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사군지』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나중에 정약용 ․ 한치윤 등의 연구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리라 본다. 특히 발해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던 그의 노력은 더욱더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유득공은 이렇게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과 역사적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 중에는 사회 개혁안이 거의 없다. 다만 그는 「용차론(用車論)」을 통해 조선에서 수레가 잘 쓰이지 않는 이유를 규명하였다. 또한 「과폐책(科幣策)」에서 과거제도의 폐단을 거론하고, 성제(城制)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것이 전부이다. 뛰어난 역사적 통찰력과 어린 시절의 불우했던 삶, 유득공 주변의 사람들을 봤을 때 그의 이런 사회개혁안 부재는 의아스러울 뿐이다.
또한 유득공은 서얼 출신으로서, 강력한 계몽 군주였던 정조의 서얼허통 정책과 그 자신의 교유했던 북학파 인물들이 없었더라면 한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해고』를 비롯하여 그의 문학적 ․ 역사적 재능을 보여주는 저작들은 그가 우리 역사의 실학자로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게 하리라 생각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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