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고려 병제에 관해
- 최초 등록일
- 2006.06.03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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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군사조직에 대해서.
수도권의 2군 6위의 경군과 지방군인 주현군과 주진군에 대해서.
부병제와 군반제에 관한 논의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펼치는 말
1. 부병제(府兵制)
- 2군6위의 경군
2. 군반제(軍班制)
3. 부병제, 군반제 절충설
- 경외군 혼성제설
4. 지방군
(1) 주현군
(2) 주진군
Ⅲ. 나오는 말
본문내용
1. 부병제(府兵制)
『고려사』를 비롯하여 당대를 다룬 사서들은 대부분 고려의 병제가 부병제였던 듯이 설명하여 놓고 있다. 구체적으로 『고려사』병지서문에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고 처음 6위(衛)를 설치하였는데, 위(衛)에는 38령(領)이 있고 영(領)은 각 1,000人 이었으니 상하가 서로 연결되고 체통(體統)이 서로 이어져서 당(唐)의 부위제(府衛制)와 유사였다.
라고 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박용운, 『고려시대사』, 일지사, p.288~289, 2002
병제설을 주장하는 강진철교수의 주장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병농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병농일치 혹은 군민일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개념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강진철교수와 이기백교수는 개념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기백 교수의 경우 이를 모든 농민은 군인이라는 국민개병에 뜻으로 이해한 반면, 강진철 교수는 군인은 곧 농민이라는 뜻으로 취하였으며, 따라서 모든 농민이 군인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강진철 교수는 부병제설에 대하여 광범하게 사료를 수집․분석하여 적극적으로 부병제를 주장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송인의 기록을 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제도는 민이 16세 이상이면 군역에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군반상위는 관부에 상유하였으며, 여군은 모두 급전수업하는데 경고가 있으면 무기를 들고 적진에 나가고 일이 생기면 기구를 가지고 노역에 나갔으며 일이 끝나면 전무에 복귀하였으니, 마치 전고의 향민제와 같았다. 처음 고려는 호가 3만에 불과하였으나 당 고종이 평양을 함락했을 때에 이르러서는 그 병사가 30만이나 되었는데 지금보니 전세(前世)에 비해 또 배로 늘었다. 왕성에 머물러 호위하는 (군대는) 통상 3만명으로서 교대로 번을 나누어 지켰다.
여기서 왕성을 지키는 경군이 3만 명이라 한 것은 편성상의 총 병원은 45령4,5000명으로 되어 있으나 통상 실제로 확보된 병력수는 이정 도였다는 말로 생각되지만, 백성의 나이가 16세에 이르면 군역을 지웠다는 설명은 『고려사』에 20세로 되어 있어서 해석상 약간의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이 기록에 의해 고려의 전체 병력(兵力)은 약 60만 정도로서 그들은 육군상위와 여군 - 아마 주현군 - 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특히 부병제와 관련하여 경군은 「교대로 번(番)을 나누어 지켰으며」 주현군은 평소 농사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과 싸우는가 하면, 성곽을 쌓는 등의 공사에 동원되기도 하고 그 일들이 끝나면 다시 농사일에 복귀했다는 서술이 주목을 끈다.
또한 고려의 병제가 부병제로 운영되던 당의 부위제를 모방했거나 그와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당의 부위제란 무엇인가?
참고 자료
고려시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