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고려시대의 혼인 문화
- 최초 등록일
- 2006.06.05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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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직접 책을 읽고 고려시대의 혼인 문화 및 여성의 지위에 대해 조사를 해봤습니다.
박유의 상소문과 이규보의 제문, 그리고 왕실의 근친혼 관계 등을 직접 스캔해서 올린 사진이 있구요.
그리고 무엇보다 고려시대의 혼인형태 및 제도를 통해 서류부가혼이 있었던 고려시대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고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의 지위에서는 균분상속 및 호주가 될 수 있었던 점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예시까지 들었습니다.
목차
1.혼인 형태
① 가족형태
② 가족규모
2. 혼인 제도
①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형태
② 당시 상속 형태가 남녀균분 상속
③ 혼인 연령
④ 혼인 시기
⑤ 이혼
⑥ 재혼
1) 왕족들의 재혼
2) 재혼녀의 친권
3) 배우자를 버리지 않는 수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
* 왕실의 혼인
3. 혼인제도에서의 여성의 지위
① 경제적 부담으로 혼인하지 못한 여성들
② 남녀의 균분 상속
③ 호주가 될 수 있는 여성들
* 장가가는 남자들
* 원삼 (圓衫) - 고려시대 혼례복
본문내용
3. 혼인제도에서의 여성의 지위
여성들은 혼인제도를 통해 관직 등 일부를 제외하면 제도적으로 사실상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물론 일부 남녀의 경제력이나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었겠지만, 보통 여성들은 균분상속과 호주로서의 권리 등 대부분의 사회적 지위에서 별다른 차별과 불이익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워낙 처가의 권력이 강한 탓에 오히려 피해를 입는 여성도 있었다. 처가의 권세와 세도가 없다는 이유로 내치고 다른 가문으로 들어가는 남성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처가의 경제력이 혼인에 있어 미치는 영향은 엄청났다. 고려 시대에는 처가의 능력에 따라 사위의 지위까지 결정될 만큼 처가의 권력이 막강했지만, 대신 혼수는 물론 혼인 이후 부부의 생활 비용까지 거의 모든 걸 처가가 부담해야 했다. 남편과 자녀들까지 처가에서 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의 신랑감이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는 선량한 사람이라 해도 처가가 부담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이 때문에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은 처가의 경제력에 따라 혼인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기도 했는데, 이 점은 고려시대 혼인제도의 대표적인 문제점 중 하나이다.
① 경제적 부담으로 혼인하지 못한 여성들
- 김지숙의 두 딸은 가난 때문에 혼인하지 못한 대표적 케이스이다. 김지숙은 충렬왕 대에 벼슬이 높았으나 청렴하여 항상 빈곤하였고, 이 때문에 딸들은 여승이 될 수밖에 없었다.
② 남녀의 균분 상속
- 조선 전기에도 마찬가지지만, 여성들은 균분상속의 원칙에 따라 상속의 권리와 의무에서 전혀 차별받지 않았다. 제사를 모시는 것도, 유부녀라는 점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기가 고려시대이다.
이 때 균분상속은 당연하게 여겨졌고, 그렇지 않으면 비난의 대상이 되는 시대였다.
청렴, 공정한 관리로 평가받는 고려의 손변은 지방관일 때 조실부모한 남매 중 시집간 누이가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며 이의를 제기한 것에 대해 이렇게 판결한 바 있다. 여기서 시집간 딸도 상속에서 결코 차별받지 않았음을 알고, 균분상속의 원칙이 지켜졌음을 재확인한다.
고려 전기의 인물 권적은 송에 건너가 관직생활을 하다가 고려로 돌아와 다시 관직생활을 한 인물로, 그가 유산을 나눠줄 때 장남에게는 관직 임명서, 차남에게는 법화서탑, 딸에게는 관음상 등을 공정하게 물려주었던 반면에, 아버지 이공수가 세상을 뜬 뒤 남동생과 여동생에게 재산을 나눠주지 않고 혼자서 독차지한 이지저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③ 호주가 될 수 있는 여성들
- 고려시대에는 혼인제도의 특성에서 나타나듯이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으며, 현재 논쟁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호주제 폐지 논란` 은 존재할 수 없었다.
참고 자료
박용운『고려시대 사람들 이야기 2』,
신서원, 2002,
최재석, 『한국 가족제도사 연구』,
일지사,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