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사]대몽항쟁기 삼별초의 모든것
- 최초 등록일
- 2006.06.15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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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시대 몽고침략기에 활약했던 삼별초에 대한 내용입니다.
삼별초의 기원에서부터 기능과 이동내용 및 그 의의에 이르기까지 기술했습니다.
삼별초를 보는 시각에 따라 그들이 반란군일수도, 대몽항쟁의 대항군이었는가를 가늠하게 됩니다. 이 자료를 통해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목차
1. 삼별초의 기원
2. 삼별초의 성격
3. 삼별초의 기능
4. 삼별초의 봉기
1) 당시 고려의 정세
2) 삼별초의 봉기
3) 삼별초의 대몽활동
4) 삼별초의 몰락
5. 삼별초 항쟁의 의의
6. 삼별초는 반란군인가 항쟁의 꽃인가?
본문내용
3. 삼별초의 기능
삼별초의 실제적인 활동을 보면 군사적인 일과 치안유지가 주된 임무였다.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았던 삼별초의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치안과 형옥(形獄)에 대한 것이었다. 삼별초의 창설 목적이 도둑을 잡는 것이었듯이 치안 유지가 그들의 임무였다. 그리고 죄인을 잡아서 가두고 심문을 하기도 하였으며 더 나아가 대역죄인에 대한 징벌도 하였다.
둘째, 도성의 방비와 왕의 친위대적 역할을 하였다. 이는 1254년 몽고의 차라대가 침입하자 경상도와 전라도의 야별초 각각 80명씩을 가려 도성을 수비하게 하였다는 것에서 도성 방위의 역할을 볼 수 있으며, 1253년에 왕이 몽고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강화(江華)에서 승천부(昇天府)로 갈 때 야별초 80명이 평복 속에 갑옷을 입고 뒤를 따랐으며, 1260년에는 원종이 몽고에 갔다가 돌아오자 태손(太孫=후의 충렬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나가 왕을 맞아 호위하였다는 것에서 친위대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셋째, 군대로서의 임무는 몽고가 침입을 함에 따라 생기게 되었다. 삼별초는 대개 야습(夜襲), 복병(伏兵), 협격(夾擊) 등의 전법(戰法)으로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대항하는 등 수많은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게 된다. 삼별초는 이러한 게릴라 전투 외에도 정찰대(偵察隊) 혹은 전위대(前衛隊)와 같은 활동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4. 삼별초의 봉기
1) 당시 고려의 정세
1170년, 무인들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이후로 이의방(李義方), 정중부(鄭仲夫), 경대승(慶大升), 이의민(李義旼) 등이 정권을 잡아 무인들이 중심이 되어 국정이 이루어져 갔다. 최씨 무신정권을 연 최충헌은 아우 최충수(崔忠粹)와 함께 이의민을 참살하고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였고, 이어 아우 최충수마저 제거함에 일인독재를 구축하게 되어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시키는 등 왕을 여러 차례 폐위시키고 옹립하였으며 그 권력 기반을 다져 아들인 최우(후일 崔怡로 개명)에게 물려주는데 성공하였다.
최우의 집권 시기에 몽고가 침입을 함에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遷都)하고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이후, 고려는 몽고와 수십년에 걸쳐 항전하게 된다.
최우가 죽은 후에도 계속 최씨가 정권을 잡고 있다가 최의(崔竩)에 이르러 마감하게 되고, 그 후로도 무신인 김준(金俊),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등이 권력을 잡게 되지만 결국, 임유무가 죽게 됨에 따라 왕은 개경으로 환도를 결정하고 몽고와 화친을 맺게 된다.
고종 46년은 고종 18년 이후 거의 30년에 걸쳐 진행되어 온 몽고군의 침입이 종식되면서 여 ․ 몽간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해이다. 전년 12월 고려정부는 몽고의 지속적인 압력을 일단 수용하기로 하고 朴希實등을 파견, 개경으로의 출륙 환도와 태자의 입조 의사를 전달하였기 때문이다.
강화도 고려정부에 대한 몽고군의 본래 요구는 출륙 환도에 있었다. 이것이 이루어져야만
참고 자료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2000
한국중세사학회, <고려시대사강의>, 도서출판 늘함께, 2001
교육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지도서, 교육부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2, 풀빛,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