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 그 의의
- 최초 등록일
- 2006.06.16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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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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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패망되었지만 한민족은 일제식민지통치를 거부하기에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일제를 거부하는 한민족은 민족의 대표기구를 세우려 노력하였다. 일제를 피해 망명한 한인들은 민족의 대표기구를 만들어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망명정부를 만들었다. 정부를 수립한 그들은 군주를 자신들의 정부로 파천시켜 군주주권의 정통성을 잇기 위해 국내에 있던 고종을 파천시키기 위한 다방면의 계획을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후 1917년 상해에서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에 의해 발의된 대동단결선언에서 국민주권국가수립을 목표로 한다는 선언을 하였는데 이로써 앞으로의 임시정부 방향을 제시하였다.
1919년 3월 1일, 3·1만세시위운동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전 세계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으로써 국민들의 의식을 신민에서 국민, 즉 국민주권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 비해 독립국임을 상징하는 제대로 된 정부도 없었고, 제대로 된 조직체계와 지휘체계가 갖추어져 있는 독립운동도 할 수 없었다. 이에 곧 한인을 대표할 임시정부의 수립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당시 국내외에는 3개의 임시정부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국내에 있던 한성정부(4월 23일), 연해주에 있던 대한민국의회 선언(3월 17일), 중국의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4월 11일)이 그것이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이 3개의 임시정부의 통합을 위한 통합운동이 벌어졌고 결국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보고 이 정부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는 수립되었다. 단지 국내에는 일제의 강압이 심하였기에 소재지는 상해에 두도록 함으로써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되었다. 결국, 임시정부는 3·1운동으로 나타난 독립국가·민주공화국가 수립의 민족적 의지를 수렴하여 수립되었다. 처음에는 민족의 대표기구로서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정부활동이 해외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국내 민중을 직접 파악하지는 못하고, 또 중국의 정세변화에 따라 많은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정부라는 이름만큼의 활동을 수행하지 못한 시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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