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세미나]삼국유사
- 최초 등록일
- 2006.06.19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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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만파식적이야기를 통해서 본 당시 시대 사람들의 삶과 바람을 고찰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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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삼국유사 속에 있는 만파식적이야기를 읽어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많다. 선왕, 즉 문무왕이 죽어서 용이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는 부분은 넘어간다고 해도 신문왕이 용과 대화를 하는 부분이나 용이 신문왕에게 가져다준 옥대의 한 부분을 떼어 물에 던지자 용이 나와서 승천하는 부분은 정말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괴이쩍어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 존재를 부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내용이 비현실적인 것은 이 이야기가 구전되어 오다가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만파식적은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 즉, 682년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그로부터 600년이 흐른 뒤인 1280년대에 만들어졌다. 무려 600년이나 구전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현실적인 이야기도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만파식적이야기는 만파식적이 생긴 시대인 신라시대가 아닌 이 이야기가 기술된 고려시대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야기가 구전되면서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나 가치관 그리고 바람에 맞게 변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이야기의 배경은 신라시대이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신라시대 사람들의 삶이 아닌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이야기 속에 개요 원년이라는 표현이 있다. 개요이란 당나라의 고종의 연호이다. 즉 개요 원년이라는 표시는 중국의 연호를 표기한 것이다. 이는 자주를 외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던 고려 초기와는 달리 고려 중기에는 자주의식이 고려 초기에 비해 많이 약해진 증거라고 생각한다. 또, 중국의 연호의 표시는 당시 거대제국으로 성장한 원, 즉 몽고족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는 한족의 나라이다. 한족의 나라의 연호를 쓰는 것은 당시 거대제국으로 성장하여 우리나라의 내정을 간섭하던 원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통일신라에는 연호가 없어 그 시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반박이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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