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인물]윤치호 일기
- 최초 등록일
- 2006.06.22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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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시대 지식인 윤치호가 쓴 일기의 사학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목차
1. 윤치호, 그는 누구인가?
2. 장장 60년 동안의 일기
3.『윤치호 일기』의 사학사적 의의
본문내용
1. 윤치호, 그는 누구인가?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5~1945), 수많은 한국의 근대 인물 중에서 그만큼 화려하고 다채로운 경력을 지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에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었고, 독립현회와 대한자강회의 회장을 지낸 개화ㆍ자강운동의 핵심인물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미국 남감리회 신자이자 YMCA운동의 지도자로서 일제시기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였다. 그런가 하면 3ㆍ1운동이 시작되자마자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독립운동 무용론’을 피력해 물의를 빝었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기독교계의 친일을 주도하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과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고위 간부를 지내며 친일파의 ‘대부’역할을 담당했다. 요컨대 그는 긍정적인역할을 했느냐, 또는 부정적인 역할을 했느냐 하는 가치판단의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 근대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윤치호는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투신, 1881년 신사유람단 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배웠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 비준 때 초대 주한 미국공사 L.H.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개화인사라는 이유로 의심을 받게 되자 상하이로 망명, 중서서원에서 3년 동안 공부하며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선교사 A.J.앨런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서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영어·신학·인문사회과학 등을 공부하였다. 1895년 귀국, 총리대신 비서관을 거쳐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서재필·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898년 독립신문사 제2대 사장, 함경도 덕원부윤, 천안군수 등을 지냈다. 1906년 장지연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힘썼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을 조직한 후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11년 105인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기 말에 한때 변절,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참고 자료
윤치호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