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창경궁의 역사를 비롯한 전반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각종 건물들을 사진자료와 함께 수록하였고, 일제시대 창경궁의 비화를 곁들였습니다.
좋은 참고 되시길 바랍니다.
목차
1. 창경궁의 연혁
1) 창건
2) 임진왜란으로 인한 훼손과 조선후기의 재건
3) 창경원으로 전락
4) 1980년대 복원
2. 궁궐의 궁제와 배치
3. 전각과 문루
1) 홍화문 - 보물 제 384호 10) 경춘전
2) 옥천교 - 보물 제 386호 11) 통명전
3) 명정문 12) 양화당
4) 명정전 - 국보 226호 13) 영춘헌, 집복헌
5) 문정전 14) 관덕정
6) 숭문당 15) 선인문
7) 빈양문 16) 월근문
8) 함인정 17) 집춘문
9) 환경전
4. 그 밖의 곳
1) 관천대
2) 풍기대
3) 성종 태실비
4) 춘당지
5) 식물원
본문내용
1) 창건
창경궁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들어선 궁궐이다. 그러나 원래 이곳에는 고려 때 궁궐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憲宗代 『宮闕志』昌慶宮 明政殿條.
즉 고려시대 남경의 궁궐인 수강궁(壽康宮) 수강궁은 고려 1356년(공민왕 5년)에 승려 보우(普愚)의 진언에 따라 남경 천도를 계획하면서 이듬해 2월에 신축되었다. (김동현,『서울의 궁궐 건축』, 시공사, 2002, p143.)
터에 들어선 것인데, 조선시대에 와서 태종이 1418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세종은 그 해에 상왕이 거처할 새 궁을 짓고, 궁의 이름을 옛 이름을 따라서 수강궁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조선조 궁궐의 본격적인 격식을 갖추게 된 것은 성종 14년에 큰 규모로 영건이 이루어지면서부터인데, 이 때에 ‘창경궁(昌慶宮)’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당시의 3대비, 즉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와 추존 왕 덕종의 비 소혜왕후(昭惠王后)한씨, 그리고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를 모시기 위함이었는데, 이들은 성종의 할머니, 어머니, 작은 어머니로, 성종 때의 창경궁 창건은 수렴청정을 했던 대왕대비 윤씨가 거처를 수강궁으로 옮기기 원한 데서 비롯되었다. 1484년 창건된 당시의 전각으로는 명정전(明政殿), 문정전(文政殿), 수녕전(壽濘殿),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揚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輝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있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창경궁이라는 궁호와 전각 및 홍화문(弘化門), 통화문(通化門), 집춘문(集春門), 선인문(宣仁門), 옥천교(玉川橋) 등의 문과 다리 이름은 당시 의정부 좌찬성이던 서거정(徐巨正)이 지었으며, 우부승지 김종직(金宗直)은 창경궁상량문(昌慶宮上梁紋)과『창경궁기(昌慶宮記)』를 지었다. 김종직은『환취정기(環翠亭記)』도 지었는데, ‘환취정’은 창경궁이 창건된 직후 통명전 북쪽 모퉁이에 성종의 어명으로 새로 건립한 정자로, 그 이름을 성종이 직접 붙였다고 한다.
참고 자료
김동현,『서울의 궁궐 건축』, 시공사, 2002.
이덕수,『신 궁궐기행』, 대원사, 2003.
한영우,『창덕궁과 창경궁)』, 열화당, 2003.
이강근,『한국의 궁궐』, 대원사, 1991.
신영훈,『서울의 궁궐』, 조선일보사, 1997.
이기웅,『한국의 고궁 건축』,열화당, 1988.
홍순민,『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8.
이해선,『한국의 고궁』,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0.
문화재관리국,『창경궁 발굴조사보고서』,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