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인문학]백범일지와 시대상황
- 최초 등록일
- 2006.06.25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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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범일지와 그 시대상황에 대해 학부시절 발표자료로 사용한 것입니다.
백범일지를 한 번 읽어보신분들을 아시겠지만, 그 책을 독서감평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자료가 여러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실것입니다.
목차
■ 독립군에서 광복군까지
■ 1940년대 당시 국외 정세
■ 분단의 과정
■ 좌익과 우익
■ 해방공간에서의 통일논의 (김구의 민족주의 vs 이승만의 현실주의)
■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본문내용
■ 해방공간에서의 통일논의 (김구의 민족주의 vs 이승만의 현실주의)
통일론이 갈등하게 된 배경은 광복 직후의 해방공간에서였다. 김구와 김규식 중심의 남북협상파와 이승만 중심의 단독정부수립파의 갈등이 그것이었다. 민족적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와의 갈등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민족적 이상주의는 북한의 일괄타결적 통일주의로 그리고 현실주의는 남한의 기능주위, 단계주의적 통일론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자가 후자의 이론적 기반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남한의 통일정책은 상당한 기간동안 혼선을 빚어왔고, 실제로 일관된 통일정책이 없었다.
해방직후 해방공간에는 여러 형태의 정치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남한의 대표적인 조직이라면 여운형의 인민당, 김구의 한국독립당, 김규식의 국민당, 송진우의 한민당, 이승만의 독립중앙촉성회 등이었고, 그밖에 공산주의세력인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있었다. 이들은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에 대비해서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었으며, 그것이 비상국민회의(민족주의 진영)과 민주주의 민족전선(공산주의 진영)이었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을 배경으로 1946년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있었다. 그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무기 휴회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니 우리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나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정읍발언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민족주의 진영은 좌우합작을 계획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좌우합작 7원칙에까지 합의를 했다.
당시 김구는 이승만의 정읍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친애하는 3천만 자매형제여! (중략) 한국이 있어 한국인도 있고, 한국인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 독립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어찌 개인이나 자기집단의 사리사욕에 탐하여 국가 민족의 백년대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중략)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져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중략)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중략)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하라.”
참고 자료
백범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