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웅장하고 화려한 화엄사 각황전
- 최초 등록일
- 2006.06.26
- 최종 저작일
- 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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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화엄사 에 답사를 다녀온후 자료 조사를 통해서 화엄사의 역사와 화엄사 내의 각황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된 글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본론
1. 화엄사의 역사
2. 각황전의 역사
3. 각황전의 구조
4. 각황전의 특징
●맺음말
본문내용
화엄사의 창건 및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며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기록하고 있고 <구례속지>에는 진흥왕 4년에 경기 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입주하게 하였다고 부연하고 있다. 화엄사의 중건에 대해서도 신라 선덕왕 때에 자장 이 증축하고 문무왕 때에 의상이 장륙전을 건립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백제 땅에 속하였던 화엄사를 신라의 승려였던 자장이 절을 세울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8~9세기에 조성된 화엄사의 석조물들을 미루어 볼때 시기 적으로 맞지 않는데에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화엄사는 1979년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 이 발견됨으로써 그 의문점이 해소되었다. 그 책에 의하면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로써 경덕왕 13년(754년) 8월부터 화엄경사경 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기켰던 실존인물임이 밝혀 짐으로써 창건연대가 경덕왕때이고 자장 및 의상의 중수 또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화엄사는 신라 말 도선에 의하여 크게 확장되었고, 이후 고려 광종때에 홍경선사가 퇴락한 건물을 중수 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광종의 어명을 받은 홍경선사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중수 및 보수가 이루어졌고, 문종대(1047~1083)에도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으며 의상대사의 덕을 흠모한 대각국사가 화엄사에 주석했던 때도 바로 이때다.
그 후 화엄사는 인종(1126~1146)때 정인왕사(定仁王師)에 의해 중수되었고 명종2년(1172)에는 도선국사비가 건립되었고 충렬왕(1313~1330)때 원소암(圓炤庵)이 중건되었다. 조선초인 세종 6년(1462)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8가람 81암자의 모든 당우와 보물들이 일시에 불타버렸고 인조 8년(1699)에 벽암선사와 그 문도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화엄사의 가람배치는 효종원년(1649)에 화엄사가 다시 선종대가람으로 승격된 직후 계파선사에 의한 장육전 중건(1699)부터이다. 장육전이 각황전으로 중건되자 숙종은 친히 각황전이라 사액했다.
참고 자료
우리사찰답사회, <전라도로 떠나는 답사기행>, 문예마당, 2005
한국 문화유산 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지리산 자락>, 돌베게, 2004
한국 건축역사 학회, <한국 건축사 연구 1>, 발언, 2003
김봉렬, <화엄사>, 대원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