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박제가의 미의식과 시론
- 최초 등록일
- 2006.06.30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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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학의를 비롯한 박제가의 문학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미의식과 문학론 등을 고찰해본 자료입니다.
목차
서 론
박제가와 <북학의>
본 론
1. <북학의>에 담긴 정신
2. <북학의>에 나타난 실용과 미(美)의 관계
3. 초정의 문학론 - 좋은 시(詩)와 그 전제조건
4. 다양성의 인정과 개성의 존중
5. 변화와 발전의 논리
6. 시인과 자연의 관계 - 제(際)
7. 초정의 심미의식
결 론
초정 박제가 시론의 문학사적 의의
본문내용
서 론
1.박제가 (朴齊家, 楚亭, 1750~1805년)
박제가는 1750년 11월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밀양 박씨이며 아버지는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낸 박평(朴坪․1700~1760)의 서자로 태어났다. 박제가는 호(號)를 초정(楚亭)․정유(貞)․ 위항(葦杭)이라 했다. 그의 유년기에 대해 ‘어릴 때부터 글을 좋아해 읽은 책은 반드시 세 번씩 베껴 썼고, 입에는 늘 붓을 물고 있었다. 그는 열한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남의 집 삯바느질로 연명하였다. 하지만 아들이 사귀는 이가 종종 어른과 손윗사람 등 이름 있는 분들이었으므로 아들을 위해서라면 있는 힘을 다해 잘 대접했다. 그래서 아들만 보고는 그의 가난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적었다. 그가 17세 되던 해 충무공의 5대손인 이관상(李觀祥)의 서녀(庶女)와 결혼하였다.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서상수, 유련, 박지원 등과 교유하였다. 함께 어울리며 스스로의 말처럼 한번 가면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돌아올 줄 모르는 사이가 됐다. 신혼 초야를 지내자마자 장인의 말을 빌려 타고 처가에서 빠져나와 이들과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하루라도 벗이 없으면 양손을 잃은 것 같네”라고 읊고 있다. 이덕무나 유득공과는 신분적 동질성과 시(詩)․서(書)․화(畵) 전반에 걸친 공통적 예술취향으로 평생의 知己가 된다. 박제가는 자신의 시집에서 호를 초정으로 삼은 연유를 밝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초사(楚辭) 읽기를 좋아해 초정(楚亭)으로 호를 삼는다.’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 네 사람은 연경(燕京․베이징) 문단에 사가(四家)라고 소개되면서 중국 문인들의 높은 찬사와 인정을 받았다.
2.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북학의>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實學者)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가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서 쓴 기행문으로 청나라 학자들에게서 배운 새 학문과 여행에서 얻은 지식을 엮은 책이다. 1778년(정조 2년),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내·외편(內·外篇) 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에는 차선(車船-수레와 배), 성벽(城壁), 궁실(宮室), 도로(道路), 교량, 목축(牧畜), 고시(賈市-상업과 시장)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이 제시되어 있다. 외편에는 전분(田糞-논밭과 거름), 상(桑-뽕나무), 농잠총론 (農蠶總論-농업과 잠업), 과거론(科擧論), 관론(官論), 녹제(祿制-관리의 월급), 재부론(財賦 論) 등 농업기술의 개량과 외국 무역의 이점이 설명되어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