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향가]서동요의 배경담과 서동, 선화의 정체
- 최초 등록일
- 2006.07.03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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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배경담의 실상과 재구성
2) 서동의 정체(두명의 서동)
⑴ 무왕으로서의 서동
⑵ 무강왕으로서의 서동
3) 사로국의 선화에 대한 무강왕의 구애가
Ⅲ.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배경담의 실상과 재구성
『삼국유사』권2의 21번째 이야기는 국문학도들에게 「서동요」로만 확대되어 보이나 사실은 百濟 30대 武王의 登國譚이요 彌勒寺創建緣起說話이다. 그래서 글의 제목부터 「薯童謠」가 아니고 列傳의 형태인 「武王」으로 되어 있다.
2) 서동의 정체(두 명의 서동)
⑴ 무왕으로서의 서동
서동의 핏줄은 「무왕」조에서 서울 南池의 沚龍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아닌 용과의 交通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왕」조의 본문에 나온 “池龍交通而生”에서 龍은 일종의 상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곧 龍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동물이나 일반적으로 임금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池龍交通而生’에서 龍도 임금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는 서동의 신분이 임금의 아들이라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⑵ 무강왕으로서의 서동
지금 미륵사가 있는 馬韓의 옛 땅 익산에도 다스리는 小邑의 城邑國家가 있었다. 그 익산에 있었던 성읍국가가 바로 乾馬國이고, 이 나라를 세운 임금이 곧 『삼국유사』의 「무왕」조에 보이는 武康王이다. 그리고 善化公主 또한 신라 진평왕의 제3공주가 아니고 건마국의 인근에 있었던 성읍국가의 공주이다.
3) 사로국의 선화에 대한 무강왕의 구애가
「무왕」조에서 무왕의 왕비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이다. 무왕의 상대로 진평왕의 딸 선화가 선택도었던 것은 무엇보다 진평왕(579-632)과 무왕(600-641)의 재위시기가 거의 비슷한 동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와 백제는 견원지간으로 두 임금의 사이가 사돈 사이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동의 신분, 부여와 서라벌 사이의 왕래에 따르는 어려움, 신라와 백제의 외교관계 등 서동은 선화의 짝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로맨틱한 동요가 창작될 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편 건마국의 서동은 이웃나라의 공주를 흠모하고 성공하여 부부가 될 가능성이 있다. 마한시대의 小國들은 아직 나라라기보다 부족국가로 그 임금은 한 무리의 추장이나 족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동의 배필감인 선화가 당시 건마국의 이웃에 잇는 작은 나라의 공주라면 무강왕의 건국담은 더욱 가능성이 높다.
참고 자료
양주동, 『고가연구』, 박문출판사, 1957.
김승찬, 『서동요 연구』, 國語國文學 第35輯, 1998.
사재동, 『서동설화연구』, 「장암지헌영선생화갑기념논총」, 1971.
김선기, 『쇼뚱노래』, 「현대문학」151호, 1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