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학]영ㆍ독 해군교섭
- 최초 등록일
- 2006.07.04
- 최종 저작일
- 2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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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일의 해군확장은 뷜로와 티르피츠의 공동작품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해군증강이 영국과의 현안 문제로 등장하자 두 사람간에는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다. 영국과의 교섭을 직접 맡은 뷜로의 입장으로서는 해군확장 계획을 어느 정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티르피츠는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목차
◈뷜로 재상과 영ㆍ독 해군교섭
◈데일리 텔레그래프신문 사건과 뷜로의 사임
◈베드만-홀베크 재상과 영ㆍ독 해군교섭
◈독일과 러시아의 접근
◈홀데인의 독일방문(1912년 2월 8일~12일)
◈영ㆍ독 해군교섭의 실패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해군협력
본문내용
◈뷜로 재상과 영ㆍ독 해군교섭
독일의 해군확장은 뷜로와 티르피츠의 공동작품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해군증강이 영국과의 현안 문제로 등장하자 두 사람간에는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다. 영국과의 교섭을 직접 맡은 뷜로의 입장으로서는 해군확장 계획을 어느 정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티르피츠는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독일 내부에서 두 사람간의 이런 이견도 문제였으나 해군교섭에 임하는 영ㆍ독 양국간에는 기본적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독일은 먼저 일반적인 정치협정을 체결하자는 입장이었고 영국은 우선 해군협정을 무조건 체결하자는 태도였다. 이런 차이로 인해 1907년 제 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영국의 해군 군축안이 독일에 의하여 거부된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헤이그 평화 이후 독일은 다시 해군확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전함의 수명을 25년에서 20년으로 단축하고 장차 퇴역하는 전함은 드레드노트 형의 전함으로 대체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티르피츠는 새로운 해군법령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영국의 여론은 대 독일 강경으로 선회하여 해군 예산을 증액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양국간의 해군 경쟁은 끝없이 계속될 전망이었다.
1909년 4월 킨테를렌-배헥터는 영국에게 정치협정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1.양국은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
2.양국은 서로 적대하는 동맹에 가입하지 않는다.
3.양국 중 일방이 전쟁하는 경우 타방은 우호적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영국으로서는 자국의 외교적인 자유를 속박하면서 해군 문제에 관하여는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는 이런 협정안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레이 외상은 독일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킨데를렌-배헥터가 말하는 영ㆍ독 협상이란 독일이 유럽에서 헤게모니를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며 그리고 그런 목적에 도움을 준 연후에는 그 협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