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춘추와 좌전, 국어
- 최초 등록일
- 2006.07.05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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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춘추와 그 내전과 외전인 좌전, 국어에 대한 글입니다.
목차
◎ 중국 최초의 역사저술, 공자의 『춘추』
◎ 좌구명의 『좌전』과 『국어』
본문내용
『춘추』의 필법은 경문 속에는 겉으로는 간결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에 불과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 기술자의 좋고 싫은 것이나 포폄의 마음가짐이 감추어져 있다. 즉 屬辭比事의 서법이다. 기술에 있어서 각종사건이 각각 고립하여 기록되어 있지만, 연도순을 따라서 일정한 사건이나 인명에 착안하여 읽어 가면 무표정하고 살풍경한 기사단문이 서로 연결되어 일관된 의미를 빚어내고 독자에게 무언가의 감명을 주는 것이 있다. 기술자도 역사가도 각자 각종의 주관을 가지고 좋고 싫은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춘추』의 은유적 표현은 굳이 필법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며, 역사의 기술은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역사학의 근본원칙이 성립되지 않은 고대에 있어서의, 기술자의 일반적인 심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술자가 단지 냉정하고 엄밀하게 썼을 뿐, 조금도 주관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속사비사에 의하여 독자는 자기 나름대로 느끼고 포폄을 할 것이다. 결국 필법이란 쓰는 방식의 문제가 아니고 읽는 방법의 문제인 것이다.
공자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역사 사실을 거기에 짜맞추고자 했고, 심지어는 왜곡하는 방법까지도 써서 사상적 관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는 隱諱적 포폄의 방법으로써 권선징악을 하고자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亂臣賊子를 두렵게 해서 주왕실의 존엄을 유지하고 봉건제의 붕괴를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신의 주관적 생각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의 『춘추』가 당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대답은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또한 당시는 기록의 조건 자체가 크게 제약을 받고 있었다. 즉 문자를 竹簡 혹은 木牘에 써야했으므로 기록의 분량 또한 제한되어야했고 한 글자라도 시비포폄으로는 기록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문장이 길어질 수가 없었다. 또한 기록을 남기는 과정에서도 시국의 어려움을 꺼려서, 재앙을 면하기 위해 꺼려서 감추는 것이 있었다. 즉 당대의 사실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못하고 명백히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는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춘추』에는 사실만 기록하고 그에 관한 언급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 사실 기록 또한 탈루가 많은 동시에 극히 간략하여 뜻이 불분명한 것들도 허다하다.
참고 자료
고국항, <<중국사학사-상>>, 풀빛,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