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시 제 1차 진주성 대첩의 실상과 바른 민족사 교육 방안
- 최초 등록일
- 2006.09.16
- 최종 저작일
- 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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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란시 제 1차 진주성 대첩의 실상과 바른 민족사 교육 방안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기본교재외에 각종 역사 자료와 직접 진주 국립박물관에 찾아가서 조사한 내용과 찍은 사진으로 구성된 레포트입니다..
나름 좋은 학점도 받았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임진왜란 이야기
2. 1차 진주성대첩의 배경과 실상
3. 제 1차 진주성 대첩 승리의 주요 인물 탐구
(1) 진주성 사수를 결의 ․ 사수한 학봉 김성일
(2) 진주성을 사수한 충무공 김시민
4. 제 1차 진주성 대첩의 승첩의 원인
Ⅲ. 바른 민족사 교육 방안
본문내용
2. 1차 진주성대첩의 배경과 실상
1592년(임진년) 5월 하순, 김해를 장악한 왜군은 전라도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남해안 연안을 따라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진격하는 양면 협공 작전을 전개하려 했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7월에 있었던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우리 수군에게 큰 타격을 입은 일본 수군이 해상활동을 중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수군의 잇따른 패배로 인하여 남해안의 해안거점 확보가 어렵게 되자, 육로를 이용하여 해안 거점과 전라도의 진입로를 확보하려는 방안을 세우고 8월 중순부터 한성주둔 병력 일부를 김해로 남하시켜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 때 진주에서는 초유사의 임무를 띠고 학봉 김성일이 도착하였다. 그러나 진주 고을은 이미 텅 빈 상태였다. 일본 수군이 남해안의 고성 등지를 유린하고 ‘진주를 점령하려 한다’는 선전을 하면서 사천쪽으로 서진하자, 우수사 원균이 노량으로 도망가 버렸고, 이에 놀란 진주 목사 이경과 판관 김시민이 지리산으로 피난을 갔기 때문이었다. 학봉 김성일이 진주 목사를 다시 불러내어 진주성을 지키게 하였으나, 목사 이경이 산중에서 병사하였으므로 김시민으로 하여금 목사를 대리하게 하였다.
목사 김시민과 판관 심수경, 곤양 군수 이광악 등이 3800여 명의 병력으로 결전태세를 가다듬고 있었고, 성 외곽지역에는 의령 의병장 곽재우가 급파한 심대성과 고성 의병장 최강, 이달 그리고 전라 좌이병장 임계영 우의병장 최경회등의 군사들이 지원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전라감사 권율은 22일에 근왕군을 이끌고 북상한 다음이었으므로, 무주·금산지역의 고바야키와 군과 싸운 뒤 남원에 집결하였던 임계영·최경회의 전라 좌우 의병부대 만이 10월 2일에 함양-단성을 급거 이동하여 진주성을 지원하게 된 것이었다.
9월 26일에 함안에 진출한 일본군은 병력을 두 개 부대로 나누어 진용을 정비한 뒤, 10월 3일 선발대 만여 명이 함안을 출발하여 4일에 진주 동쪽 외관 마현(馬峴=말띠고개)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의 주력은 6일 아침부터 남강을 도하하여 진주성을 동·서·북 삼면에 포위 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하였으나, 의병부대들이 여러 곳에서 수성군(守城軍)과 호응하여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으므로, 섣불리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가 8일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사다리와 나뭇단을 성벽을 기대어 놓고 그것을 밟고 기어올라 성벽을 넘으려고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바퀴가 달린 삼층 누각을 만들어 접근시켜 놓고 그 속에서 성을 내려다보면서 조총사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박익환, <새 교육과정에 의한 사회과 역사 문화교육론>
서인환, <길고 긴 7년 전쟁>,『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국립진주박물관,1999
지승종, <16세기말 진주성전투의 배경과 전투상황> (2000년4월)
국립진주박물관 (http://jinju.museum.go.kr/)
문화재 지식 정보 센터 (http://info.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