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 최초 등록일
- 2006.09.17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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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간호 역사와 관련된 세계적인 사건 조사
목차
없음
본문내용
16세기, 프랑스는 카톨릭을 믿는 프랑스와 개신교가 국교인 나바르로 양분되어 있었으며 후반에는 8차례나 종교전쟁 (위그노 전쟁:1562∼98)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구교도와 신교도의 종교전쟁으로 피폐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그노 전쟁 이후, 위그노(Huguenot)와 카톨릭은 각각 영국과 에스파냐라는 외국세력까지 끌어들여 격렬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기즈 공(公)을 중심으로 한 카톨릭파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위그노)도 부르봉과 콩데 공(公) 등을 지도자로 무장봉기하여, 30여 년 동안 내란이 전개되었다. 신교인 위그노와 카톨릭 간의 종교적 분열은 마침내 성(聖) 바르톨로메오의 학살과 같은 대참사까지 일으켰다.
위그노(신교도)의 수령 콜리니(Coligny) 장군은 내란의 재발을 막기 위해 에스파냐에 대항해 전쟁을 지원하고자 하였고, 샤를 9세도 모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몰래 승인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카트린은 왕에 대한 위그노인 콜리니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염려하여 오랫동안 그녀의 위치를 불안하게 하던 숙적, 카톨릭교도인 기즈(Guise) 가(家)와 손을 잡았다. 카트린은 딸의 정략결혼으로 신 ․ 구교도 간의 화해를 꾀하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기즈 가(家)가 계획한 콜리니의 암살을 승인하였다.
1572년 8월 18일, 카트린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즉 마고와 나바르의 앙리 부르봉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위그노들이 파리로 몰려들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결혼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나, 성장한 신부 마고의 옆에는 웬일인지 신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칼뱅 교도(위그노)였던 앙리 드 나바르 (후일 앙리 4세)는 성당에 들어오지 않고 식이 끝날 때까지 문전에서 서성거리며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파리의 구교도 시민들은 모두 앙리 나바르를 향해 빈정대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들의 결혼은 며칠 후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 사건’으로 장식되었다.
참고 자료
도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 콜린 존스 지음 / 방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