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남경시대는 장개석(蔣介石)주도의 국민당(國民黨)이 남경(南京)에 국민정부를 건설한 1927년부터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시작된 1937년에 끝난다. 새 정부는 대중의 열정적인 지지를 받고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욕구가 강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927년부터 37년까지를 남경정부의 황금시대라고 하지만 개혁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정된 시기는 불과 6,7년 동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 남경정부 하에서 경제는 발전하였고, 민중들도 정부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권은 여전히 불안하였는데, 많은 부분을 군사력에 의존하였고, 정책과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정부차원의 행정, 정치제도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군벌(軍閥)시대를 거쳐 등장한 중국 국민정부(國民政府)는 정권의 기반이 극히 취약했다. 항일전을 거치면서 약화되긴 했지만 내전기간 동안 우수한 장비와 물자를 보유하고도 국민정부는 ‘왜 대륙에서 패퇴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은 국민당정권의 몰락과정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다. 국민당정권은 공산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너진 것이며, 붕괴의 원인은 진보와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에 대해 정권구조의 민주성이 결여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글에서는 장개석 국민정부의 여러 가지 붕괴 원인 중에서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국민정부의 경제 발전상과 경제정책의 시행, 그 결과를 중심으로 정권에 있어서 경제의 중요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목차
1. 머리말
2. 남경정부하에서의 경제정책
1) 중일전쟁 발발전 국민정부의 경제상황
2) 중일전쟁 하에서의 경제발전
3. 장격국과 금원권 통화개혁
1) 통화개혁의 배경
2) 장경국에 의한 통화개혁의 시행
3)금원권개혁의 실패
4. 맺음말
본문내용
3)금원권개혁의 실패
물가통제의 철폐는 대륙에서 국민정부(國民政府)의 최종적인 붕괴의 시작이었다. 물가통제가 해제되자 경제는 군사정세만큼이나 빨리 악화되었는데, 물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올랐다. 가격통제 해제 후에도 쌀과 생필품의 상해유입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이로써 상해의 물가는 치솟았고 식료품 부족현상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1949년 초에 이르면 금원권의 값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국민정부는 필사적으로 금원권(金元券) 대신 새로운 은원권(銀元券)으로 바꾸는 또 다른 통화명복변경을 시도하였지만, 금원권은 전의 법폐처럼 사실상 그 값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통화개혁의 실패원인에 대해 정리하면, 첫 번째로 금원권을 너무 많이 발행함으로써 인플레의 재생을 자극한 것이고, 두 번째로 국민정부의 행정력이 약하였고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긴급조치가 실패한 것은 사람들이 금원권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상당히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상태에 처했던 국민정부로서 새로이 통화개혁을 실행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적이야 어쨌든 잘못된 과정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좀더 효과적인 통화개혁과 경제정책의 추구가 절실히 필요하였던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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