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광복활동
- 최초 등록일
- 2006.10.11
- 최종 저작일
- 2006.01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할인쿠폰받기](/images/v4/document/ico_det_coupon.gif)
소개글
김구와 광복활동 - 생애, 임시정부 활동과 해방 후 활동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대학 수업에서, 위 주제에 대한 발표 참고 자료집으로 사용된 것임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목차
1. 김구의 생애
2. 김구와 임시정부
♣임시정부의 흐름 속에서 김구 발견
♣김구고찰
-1. 김구의 민족주의
-2. 김구의 독립운동 노선
-3. 김구의 민족주의 한계를 비판
-4. 교훈
3. 김구의 광복이후 활동
♣국내외의 건국준비
♣해방 후 흐름
-모스크바 3상회의와 김구
-왜 김구는 여운형의 좌우합작에 참여하지 않았는가?
-김구와 남북회담
-김구의 남북회담 참석에 관한 평가
본문내용
1. 김구의 생애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집안을 일으키려고 열 두살 때부터 과거를 준비해 열입곱 살 되던 해 과거에 응시했지만 실력보다는 돈이나 권력으로 관직을 사고 팔던 당시의 썩어빠진 벼슬아치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느껴, 높은 벼슬을 얻어 집안을 일으키려던 생각을 버렸습니다. 실의에 빠져 있던 김구 선생님은 아버지의 권유로 점쟁이가 되기로 마음먹고, 풍수와 관상 같은 것들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김구가 인상 깊게 생각-`사람은 얼굴이 좋은 것보다 몸 좋은 것이 낫고, 몸이 좋은 것보다는 마음 좋은 것이 낫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양반 상놈 구분 없이 평등한 새 백성들끼리 외국의 압력이나 간섭을 받지 않는, 새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동학에 김구 선생님은 푹 빠져들어 어린 나이로 동학의 접주가 됩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아기 접주`입니다.
다음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태훈 진사의 집에 피신하게 됩니다. 그 곳에서 나중에, 하얼빈 역에서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는데 가장 앞장섰던 일본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를 알게 됩니다. 안중근 의사는 안 진사의 아들입니다. 그 댁에서 평소 안 진사와 친분이 있던 고능선 선생님을 만나 학문도 익히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을 배우게 됩니다.
이후 일본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스지다쇼)을 때려 죽이고 김구 선생님은 `지금 왜놈이 궁궐 안에 들어와 왕비를 죽여도 백성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내가 잡혀가 크게 소문이 나면, 나라가 이렇게 위태롭다는 걸 백성들이 알아서, 모두 힘을 합해 나라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나 하나쯤은 죽어도 좋습니다`고 하였다. - 김구의 애국심을 알 수 있는 부분.
[위 답변에 김구선생을 테러단체를 지휘한분이 이라고 한분이 있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독립운동을 테러라 하면 일본의 침략은 정당하다는 말이 되는 것 입니다. 글을 잘 생각하고 올려야 합니다. 김구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운동을 한 것 입니다.]
그는 민족지상주의의 표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배타적이고 비합리적인 국가주의적 양태가 아니고 세계의 평화주의적 신조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데 큰 의미가 았다. 민족주의와 세계주의를 상호배타적 관계로 보지 않고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세계 평화에 접근한다는 상호조화적인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 본문중에서
참고 자료
한민족 독립운동사 연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