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의 재검토
- 최초 등록일
- 2006.10.13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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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 기사를 중심으로 한 논란을 다루고 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본론
ⅰ. 우리 역사속에 나타났던 광개토왕비
ⅱ. 일본의 연구와 전개 과정
ⅲ. 우리나라의 연구와 전개 과정
ⅳ. 광개토왕비문 검토-신묘년조(辛卯年條)기사를 중심으로
ⅴ.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문제
3.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들을 꼽으라고 하면, 그 드넓은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전성기는 절대 빠지지 않을 것이다. 통일신라이후로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만 이루어진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는 하나의 아쉬움과 향수로 다가온다.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는 그런 찬란했던 고구려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세계에서 비석이 가장 많은 나라가 중국이다. 그 중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 광개토왕비(이하 비)이다. 장방형의 비석은 전체 4면에 빽빽하게 1,775자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한 글자의 크기는 약 평균 14~15cm이고 5mm정도이다. 학자에 따라서 1,802자라고도 한다. 일부 글자는 마모되어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비는 우리 고대사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이고, 삼국사기(三國史記)등 고대사 관련 사료에서 나오지 않은 미흡한 부분을 보충하는 아주 중요한 금석문(金石文)이다. 이 비를 통해서 당시의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와 관계를 가늠하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이 비는 모두 알다시피 고구려 영토를 획기적으로 넓힌 광개토대왕을 기려 세워진 것이다. 대왕이 돌아간 뒤, 그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건립연대는 414년 9월 29일에 왕을 안장(安葬)하고 그 능 앞에 비석을 세웠다고 기록 되어 있다. 당시 고구려의 왕도(王都)였던 압록강의 국내성(國內城)근교에 세워진 것이지만, 현재의 행정구획상으로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속해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두에는 고구려 건국자 추모(鄒牟) 주몽(朱蒙)을 뜻함.
의 출생과 건국담, 그리고 광개토대와의 일반적인 치적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본론에는 광개토대왕 재위시의 영토확장사업의 주요 내용이 세부적으로 연도별로 새겨져 있다. 결론에는 광개토대왕의 무덤을 관리하는 묘지기 330호(戶)의 출신지역과 이름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본론 부분의 영토확장 중 신묘년조(辛卯年條)기사를 중심으로 한일(韓日)양국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어왔고, 연구도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최근에 들어서는 무덤을 관리하는 묘지기, 이른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문제를 통해 고구려 당시의 사회사의 일면을 보려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참고 자료
이기동,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 한국사시민강좌 』제3집 1998
천관우「광개토왕비문의 연구사적 검토」학연문화사(고구려 연구)1996
김현숙「광개토왕비를 통해 본 고구려 수묘인의 사회적 성격」한국사연구 제65호1989
서영수「광개토왕비문의 연구사적 검토」학연문화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