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기 일본인의 한국교육관
- 최초 등록일
- 2006.10.23
- 최종 저작일
- 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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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론
II. 갑오개혁기와 교육개혁
1. 시대적 배경
2. 외국어를 통한 근대화와 갑오교육개혁
III. 일본인의 한국교육관
1. 다나카 토오사쿠(田中登作)의 조선교육관(1894.8)
2. 오카쿠라 요시사부로(강창유삼랑)의 「조선국민교육신안」(1894.8)
3. 쓰쓰미 도라조(제호조)의 「조선교육책」(1895.4)
IV. 맺음말
본문내용
I. 서론
본 연구는 갑오개혁기(1894.7-1896.2)에 일본인들이 한국 교육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으며, 특히 이 시기 한국에서의 교수용어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일본인들의 논의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화된 서양학문을 받아들이기 위한 교수용어는 전문분야에 따라 다양한 외국어가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자국 언어와 문자에 의해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독립자존의 정신을 길러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조선시대에 이두와 한글을 병행 사용하면서도 공식적인 문서에는 한문(漢文)만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사대주의적 문화예속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갑오개혁을 시작하면서 1894년 7월 27일에 발족한 군국기무처는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부문에 걸쳐 과감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교육사적으로도 과거제 폐지와 신분제 타파 등과 함께, 새롭게 설치된 학무아문(學務衙門)의 편집국에서는 국문철자(한글)와 문서번역, 그리고 교과서 편찬을 담당하여 독립자존의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게다가 12월 17일(음 11.21) 칙령 제1호 「公文式」의 제14조에서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하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혼용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홍범14조」(1895.1.7)는 순한문․순국문․국한문혼용의 3종 문체로, 고종의 「敎育立國詔書」(2.26)는 한문 및 국한문 혼용문으로 발표되었다. 또한 1894년 7월 23일 이래 한문으로만 간행되던 관보는, 1895년 2월 23일 이후 국한혼용문을 사용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한글의 지위는 점차 자리잡게 되었고, 1896년 4월 7일 「독립협회」가 한글판과 영문판 「독립신문」을 간행함으로써 한글의 위치는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본 연구는 문헌연구로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