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존 밀턴 John Milton, 1608~74, London.의 작품은 17세기 이래 오늘까지 영문학의 고전으로 상당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에 부침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가 차자하는 고전적 위치는 여전히 확고하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밀턴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밀턴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줄 독자가 많지 않을 것으로 예견했을 정도이다. 그래서 밀턴의 작품들을 좀 더 견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밀턴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그의 개인적 경험 작품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목차
1. 존 밀턴은 어떤 시인인가? ·························································2. 밀턴의 생애와 그 시대 ··································································
3. 밀턴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
4. 작품연구 ①「리씨더스(Licydas)」 ····································
작품연구 ②「실낙원(Paradise Lost)」 ·······················
5. 맺음말 ·············································································································
6. 부록 (참고문헌소개) ·········································································
7. 존 밀턴 연표 ····························································································
본문내용
케임브리지를 떠난 연후에 밀턴은 잠시 방황의 길에 접어든다. 그는 의욕적 열정이 강한 청교도 일지라도 어떤 극단적인 종파에 속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고 자유로운 정신에 대한 갈망으로 인하여 성직에 대한 욕망도 저하되었다. 1632년으로부터 1638년까지 그는 호튼(Horton)에 있는 그의 부친의 시골 저택에서 보내며 분주한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연과 교류했다. 그리고 고전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방대한 분야의 서적을 탐독하면서, 나아가 음악과 종교에 대한 명상에 심취하면서 5년간의 세월을 보냈다.이러한 세속으로부터 등진 그의 명상의 세월은 다가올 그의 미래의 시작을 위한 정신의 단련기로 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에 밀턴은 한 쌍의 자매 시들인 "랄레그로"(L`Allegro)와 "일 펜세로서"(ll Penseroso)를 썼다. 이 두 편의 시들은 명랑한 사람과 명상에 잠긴 사람의 대조적인 면을 대치시켜 관찰한 시들로서 밀턴의 상반된 두 성격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의 아름다운 자연 정경에 대한 환희와 신의 존재에 대한 영적이고 지적인 명상의 두 세계가 이 시들에서 대치된다.
1534년에는 브리지 워터(BTidgewater)백작의 청을 들어 『코머스』(Genius)라는 가면극(masque)을 만들었다. 이 극은 너무나 도덕적인 설교에 치운 친 감이 있으나 우아한 이미저리와 음악정 때문에 극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37년에 절친한 친구 에드워드 킹(Edward King)이 아일랜드 해협의 배 침몰사고로 요절하게 되자 밀턴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념시를 썼다. 이 시는 그리스 고전의 전원시의 형식을 빌린 풍유적 전원시(allegorical pastoral)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그의 후기 시에서 더욱 뚜렷해지는 청교도적 정신을 명백히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그는 수 편의 아름다운 소네트 시들을 남겼으며 이러한 소네트의 제한 된 시 양식을 가장 훌륭하게 소화해 낸 시인들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 제 2기 (1638~1660)
밀턴의 문학적 재능이 점점 완숙기에 접어들 무렵. 그는 분주한 도회지의 생활로 되돌아간다. 그는 그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유럽대륙의 여행을 계획하고 불란서와 스위스, 그리고 이태리로 여행한다.
그는 불란서에서는 추방된 유명한 네덜란드의 학자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를 만나며 플로렌스에서는 투옥중인 갈릴레오(Galileo)를 만난다. 그리고 그리스로 그의 여행을 계속하던 중 국내의 위급한 상황을 듣고 급거 귀국하여 청교도 교의를 실행하기 위해 열정을 바친다. 그는 1640년과 1560년 사이에 영어와 라틴어로 수많은 유명한 논문들을 썼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1644년에 쓴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이다. 이 글에서 그는 언론의 자유를 강력히 요구한다.
1643년에 밀턴은 당시 17세이던 메리 파웰(Mary Powell)과 결혼한다. 그러나 왕당파 가문의 밝고발랄한 분위기에서 자랐던 그녀는 그녀보다 두 배나 연상인 엄격한청교도였던 그와는 잘 맞지 않았다. 그들의 결혼은 행복하지 못했으며 그들은 당분간별거생활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이혼론에 대한 논문을 쓴다. 1649년에 찰스1세가 교수형을 당한 후에 밀턴은 공화 정부의 외무담당 비서로 임명되며 크롬웰과공화정부. 그리고 청교도의 대의를 지지하는 글을 활발하게 써낸다. 1652년에 그는 43세의 이른 나이에 완전히 실명상태가 되고, 1년여 후에는 세 자매를 그에게 남겨놓고서 그의 아내가 죽는다. 1656년에 밀턴은 캐서린 우드코크(Katherine Woodcock)와 재혼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결혼은 1년 남짓 지속되고. 그의 두 번째 아내도 죽는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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