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사상에 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6.11.01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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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짧은 평가~
목차
1. 들어가며
2. 본론
1) 퇴계 이황 (1501~1570)
2)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3. 마치면서
본문내용
1. 들어가며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한국(韓國) 성리학(性理學)에서 그 위치가 가장 높은 두 학자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살았던 16세기에서 이들의 위치는 독보적이였으며, 성리학(性理學)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후에 영남(嶺南) 학파(學派)와 기호(畿湖) 학파(學派)라는 학파가 성립이 되어 17세기와 18세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영남(嶺南) 학파(學派)와 기호(畿湖) 학파(學派)는 한국(韓國) 성리학(性理學)에서 쌍벽을 이루며 그 사상(思想)이 전개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실학(實學)이라는 학문의 경향(傾向)에도 영향을 주어 그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적(性理學的) 경향(傾向)이 16세기와 17, 18세기와는 약간 다른 경향(傾向)이 일어난다. 이는 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워왔듯이 역사적은 흐름(배경)과도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다.
조선(朝鮮)은 1592년에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하여, 1627년에는 정묘호란, 1636년에는 병자호란을 차례로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국력은 쇠약(衰弱)해지고,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은 문화적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 그리고 성리학(性理學) 중심의 정치체계에 일대 반성(反省)과 회의(懷疑)를 불러오게 한다. 동서철학연구, 한국동서철학회, 이영자, p 212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중엽에 발단된 정치권의 분열은 1590년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고, 서인은 숙종 대에 이르러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등 지도층의 분열 양상이 노골화 되었다. 계속되는 기근과 전염병의 창궐, 이괄의 난 등 사회적인 위기도 심각하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배경 하에서 17세기와 18세기의 성리학(性理學)은 다양한 학풍(學風)을 가져오게 되었다. 위의 책, p212~213
그리고 특히 16세기의 대표적 성리학자(性理學者)인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철학적(哲學的)인 특성에 근거하여 크게 영남(嶺南) 학파(學派)와 기호(畿湖) 학파(學派)가 형성된다. 이들 학파(學派)는 퇴계(退溪) 학파(學派)와 율곡(栗谷) 학파(學派)라고 불리워질 만큼 이들이 가지는 그 위치는 실로 엄청난 것이였다.
이들의 대립적인 양상의 근거를 따지자면 퇴계(退溪)는 주리적(主理的)인 입장에서의 해명을 하고 있었고, 율곡(栗谷)은 주리적(主理的)인 입장에 한정되어있지 않은, 퇴계(退溪)의 입장보다는 상당히 개방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