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시]성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 최초 등록일
- 2006.11.02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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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순교자 토마스 모어 경(Sir Thomas More)(1478-1535)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자료입니다.
목차
법률 가,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
토마스 모어 경의 가족
Sir Thomas More - HOLBEIN, Hans the Younger
*토마스모어의 사상*
본문내용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1478-1535)
성인 토마스 모어 경 Sir Thomas More
HOLBEIN, Hans the Younger 1527. Tempera on wood, 74,2 x 59 cm. Frick Collection, New York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St. THOMAS MORE M. ; San Tommaso Moro Martire
Born : 1478 at London, England
Died : beheaded (참수) in 1535 ;
head kept in the Roper Vault, Saint Dunstan"s church, Canterbury, England
; body at Saint Peter ad Vincula, Tower of London, England
Canonized (시성) : 1935 by Pope Pius XI (교황 비오 11세)
Tommaso = gemello, dall"ebraico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법률 가,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
토마스 모어는 1478년 영국의 수도 런 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강직한 성격으로 지방민의 신망이 두터운 판사였다.어려 서 어머니를 여읜 토마스 모어는 엄격한 아버지 슬하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토마스 모어가 초 등학교를 졸업하고 12세 때에는, 그 당시 중직에 있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요한 머턴 추기경의 조수 생활을 하였다. 솔직하고 담백한 토마스의 성품은 곧 추기경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추기경의 도움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당시 문학을 한다는 이들은 연약하고 게을러서 타락의 구렁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런 환경에 휩쓸릴 겨를없이 오직 면학에만 열중했다. 이는 엄격한 아버지가 보내주는 약소한 학비로 그런 방면에 여유를 갖지 못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토마스의 유년 시절부터 마음속에 굳게 간직한 신앙과 열렬한 기도 생활의 힘이 더욱 컸던 것이다. 토마스 모어는 다윗 성왕의 시편에서 마음에 맞는 구절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스스로 기도문을 만들어 조석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토마스 모어의 학교 성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수(秀)였다. 특히 토마스는 라틴어에 능숙하여 어려운 문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렵다는 시인 루싱아의 소설 중의 회화편을 손쉽게 영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의 입신 출세만을 바라던 아버지는 토마스를 더 이상 그곳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토마스는 곧 런던에 돌아와 법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의 공명정대한 사건처리 솜씨는 곧 그 지방민들의 깊은 신망을 받게 되었고,1504년 헨리 7 세 치하에서 최초로 불과 25세라는 약관에 민의원(하원의원)에 당선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민의원이 된 토마스 모어는 개인의 이익보다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 된다는 결심아래 그야말로 분골쇄신하여 활약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추가 예산안 작성 시에 10만 파운드의 예산액을 3만 파운드로 삭감하려는 논쟁을 벌여 그 결과 불행히도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토마스 모어는 일단 의원직을 사퇴했으나, 정의를 위해 싸운 그의 공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한편 토마스 모어가 법률을 더 깊이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뒤 4년 동안 가끔 가까운 수도원을 찾아 수사들과 같이 고행의 생활을 하는 것을 배웠고 그것으로써 일신상의 덕을 닦았다. 그동안 토마스 모어는 수사나 혹 사제가 되려는 생각으로 이를 지도신부에게 이야 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승낙을 받지 못하고 다만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2년간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유학했다. 거기서 돌아온 토마스 모어는 다시 변호사업을 시작하고 경건한 요안나 골드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