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이 레포터는
해방직후 정치노선을
`이승만`, `여운형`, `김구` 중심으로
비교 평가한 글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신탁통치에 관한 입장
(2) 5.10 총선거에 대한 입장
(3)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입장
(4) 나의 비교 평가
결론
본문내용
수립을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융통성 있는 노선으로 평가할 수 있다.
(2) 5.10 총선거에 대한 입장
김구는 민족자결주의적 원칙에 입각해서 단독정부가 아닌 진정한 민족통일정부를 구성할 목적으로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남북 협상은 공산측이 시간 연장으로 공산화하자는 계획에 불과한데, 일부 정치지도자들이 이것을 모르고 참여하려 하는 것은 대세를 파악하지 못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앞의책, p110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를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 구종서(한배호 엮음), 『한국현대정치론 (제 1공화국의 국가형성, 정치과정, 정책)』, 나남, 1990, p107
이라고 말했다. 결국 김구의 임정법통론은 잠시 접어두고 남한에서만이라도 새로운 독립 정부를 세워야 한다며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5.10총선거)를 전반적으로 성공리에 실시했다. 이로 인해 남한 단정 수립을 위한 조치인 5월 10일 총선거의 실시로 남북 협상의 현실적 의미는 무산되고 말았다.
김구쪽의 ‘한국 독립당’ 세력은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고, 통일 국가 수립 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김구의 노력은 단정노선에 대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구성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민족 운동의 연장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3)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입장
이승만의 단정론이 표면화되자 중도파는 좌우합작운동 1946년 5월 25일부터 공식화된 좌우 합작 운동은 국내의 좌우 ․ 중간 세력이 합작 연합하여 통일 국가 수립에 매진할 것을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우익의 민주의원을 대표하는 임정계의 김규식과 좌익의 인공계의 여운형 사이에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한반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는 미소 양국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 즉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통한 한반도 문제의 국제적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을 더욱 적극화했다. 또한 제 1차 미소 공위가 실패한 뒤 여운형은 민족분열을 극복하고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하려는 좌우합작운동을 시도하였다. 좌우 합작 운동에 대해서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과 신한민족당은 공식적으로 지지를 표명했으나 이승만은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이런 과정에서 제 1차 회담에서 좌익쪽 대표로서 여운형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 했고, 미소 공위 속개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 등을 제시했다.
중간파인 김규식,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익 대립의 심화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중간파적 정치세력들의 이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통일 민족 국가 수립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해방 정국에서 우파정치세력이 미국과 연결되어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했고, 좌파 측이 소련과 연결되어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했다면,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정치세력은 대체로 사회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 조범래, 『김구의 생애와 독립운동』, 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 운동사 연구소.
- 김수자, 『이승만의 일민주의 제창과 논리』,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2004
- 구종서(한배호 엮음), 『한국현대정치론 : 제 1 공화국의 국가형성, 정치과정, 정책』, 나 남, 1990
- 황의서,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세력의 정치노선』, 한국정치학회보, 1997
- 이기형, 『여운형 평전』, 실천 문학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