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와 거란의 교류
- 최초 등록일
- 2006.11.09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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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와 거란의 교류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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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순망치한 관계의 발해와 거란
원래 발해국과 거란은 세수 관계가 아니고 순망치한의 관계. 즉 서로 의존적인 평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초기 거란의 사회는 민주적 귀족제에 기반을 둔 부족 연맹체제였다. 양국 간에는 평화적인 문물 교류가 자연스레 이루어져 교역도 빈번하였고, 교역을 하면서 문화적인 교류 또한 활발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문물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발해국이 주변 국가와 교류하였음을 보여주는 5도(영주도, 조공도, 신라도, 일본도, 부여거란도) 가운데 ‘부여거란도’가 있다는 것이다. ‘부여거란도’도는 거란을 비롯한 북방유목민족들과의 교역을 할 때 쓰였던 교역로로 주로 일본이나 당에서 나오는 교역물품을 사들여 다시 거란이나 북방민족들과 교역할 때 쓰이던 중요한 중계무역로였다. 그러나 순수한 문화적 교류도 아보기가 거란 사회의 통치권을 거머쥐고 전제군주로 등극하여 거란이 중국본토 침공을 목표로 삼고 그 발판으로 발해를 침공 했을 때 평화적인 관계는 깨지고 세수 관계로 탈 바뀜 된 것이다.
2. 발해 내에서의 거란 영향을 받은 고구려계 민족
발해는 거란의 장막풍속에 영향을 받았다. ‘송막기문’을 보면 아보기가 발해국을 멸망시키고 나서 장막 생활을 하는 천여 호에 이르는 명족을 연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들 천여 호에 이르는 명족에게 논과 밭을 지급하고 장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라는 기사를 만날 수 있다. 장막생활은 북방유목민의 고유풍속이다. 거란족은 북방유목민이다 보니 선.후배 유목민처럼 장막 생활을 이상적인 생활로 여겨왔지만 발해국을 구성하고 있는 고구려계와 말갈계 어느 계열의 민족을 보더라도 유목민이 아닌 정착민 이었으므로 이들에게는 장막생활보다 농경 생활이 적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발해국에서 장막생활을 한 명족 천여 호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발해 내에서 거란의 풍속에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이며, 또한 강제 이주 된 그들이 이주 된 지방에서 농경생활을 계속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수렵 생활에 익숙한 말갈계가 아니고 농경생활에 익숙한 고구려계 민족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참고 자료
서병국, 발해 제국사.
서병국, 『발해 발해인』, 일념, 1990.
박시형, 『발해사』, 이론과실천, 1979.
韓圭哲, 1994,《발해의 대외관계사》, 신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