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농민운동
- 최초 등록일
- 2006.11.10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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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농민운동
홍경래의 난과 임술민란(진주농민운동)을 중점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목차
․홍경래의 난.
(1)홍경래 난의 연구.
(2)홍경래의 난에 대한 한계 지적의 글.
(3)이의 제기.
․진주농민 항쟁.
(1)진주농민 항쟁의 연구.
(2)전개 과정.
(3)봉건정부의 대책.
(4)역사적 의의.
․19세기 조선사회(농민항쟁정리).
본문내용
․홍경래의 난
(1)홍경래의 난의 연구.
19세기 초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의 주도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넓은 의미에서의 농민 반란. 조선 후기에 사회·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지식인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사로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지만, 종래의 관직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포섭할 수 없어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1728년(영조 4)의 이인좌난(李麟佐亂)은 주도층이 비록 과격한 소론 중심의 지배층이었지만 중간층 및 하층민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기층 세력의 저항이 격화되는 양상을 반영하였다.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 발전과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지역민들의 불만이 더욱 컸다. 용강의 평민 출신으로 유교와 풍수지리 등을 익힌 지식인이자 용력을 갖춘 장사(壯士)인 홍경래는 봉기 10년 전부터 각처를 다니며 사회 실정을 파악하고 동료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비슷한 성격의 지식인이자 상인인 우군칙, 명망 있는 양반 가문 출신의 지식인 김사용(金士用)·김창시(金昌始), 역노(驛奴) 출신의 부호로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李禧著), 장사로서 평민 출신의 홍총각(洪總角)과 몰락한 향족(鄕族) 출신의 이제초(李濟初) 등이 최고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의 신분과 생업은 매우 다양할 뿐 아니라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지만, 용력을 갖춘 지식인이 총지휘를 하고 저항적 지식인이 참모를 맡았으며, 부호가 봉기 자금을 대고 뛰어난 장사들이 군사 지휘를 담당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 밑에 평양의 양시위(楊時緯), 영변의 김운룡(金雲龍)을 비롯한 장사들이 군사 지도자로 참여하였다. 이 장사들은 주로 홍경래의 조직활동에 의해 봉기의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평안도 남부 및 황해도로부터 모여든 인물들이었으며, 봉기 당시 30~40명 가량이 적극적으로 항쟁하였다. 박천의 김혜철(金惠哲), 안주의 나대곤(羅大坤) 등 상인들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특히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절대적인 성과를 올렸다. 주도 세력은 또한 철산의 정경행(鄭敬行), 선천의 유문제(劉文濟) 등 청천강 이북 각처의 권력을
참고 자료
NAVER(백과사전,전문자료),
동학과 농민전쟁(이영호, 2004년),
한국사론[21] (송찬섭, 1992년),
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와 사회변동(동학농민혁명 기념 사업회 지음),
1862년 농민항쟁(망원 한국사 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