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한국의 관계
- 최초 등록일
- 2006.11.17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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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좋은 점수 받은 레포트입니다~^^ 따로 올린 PPT자료와 함께 보셔야할듯 합니다~
목차
역사 및 외교
경제
유학
관광
우리 일상 속의 프랑스
본문내용
1. 역사 및 외교
(1) 19세기
1831년 로마교황청에서 조선 교구를 창설한 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1836년부터 3년에 걸쳐 엥베르, 모방, 샤스땅 등의 신부들이 몰래 입국하여 포교활동을 한지 4년 후인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희생되어 결국은 프랑스 군함이 조선 해안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조선에 대해 항의문을 띄웠으나 실패하였다. 1866년(고종3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정책으로 프랑스 선교사 12명중 9명이 처형당하자, 그중 살아남은 Ridel 신부는 중국으로 피신했고, 천진에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Roze 제독을 방문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프랑스 해군은 자국인의 인명손실에 대한 항의와 보복을 명분으로 강화도에 침공, 사고(외규장각) 및 은괴 등을 약탈하였다. 선교사 처형사건을 계기로 조선정부에 무력을 행사, 문호를 개방시키고 통상을 요구할 목적으로 병인양요를 일으켰으나 당시로서는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 후 20년만인 1886년 6월 4일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서유럽 국가 중 한국과 가장 먼저 관계를 갖기 시작하였다.
*외규장각*국방상 안전하고 보다 체계적으로 자료들을 관리할 목적으로 1781년에 세워졌다. 외규장각은 1776년 창덕궁에 설립된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고 병인양요로 불타 없어지기 전 까지 1천 7종,5천 67책이 소장돼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병인양요때 프랑스가 약탈한 359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방화로 소실된 것이다.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는 지난 1975년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씨가 베르사이유 별관 파손 창고에서 처음 발견, 세상에 알려졌으며 92년 7월 주불 한국대사관이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요청하면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후 93년 9월 서울에서 열린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교환기본 원칙이 합의됐고 이 때 한 권이 반환됐다. 그러나 한국 측은 무조건적인 반환을 주장하는 한편 프랑스 정부측은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