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에 대한 긍정과 부정
- 최초 등록일
- 2006.11.22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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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수업 발표문 입니다. 교수님께서 잘 정리해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목차
Ⅰ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
Ⅱ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배경
Ⅲ 임진왜란과 광해군
1. 임진왜란 시기의 광해군
2. 임진왜란 후 민심수습
Ⅳ 왕권강화의 의지와 집착
1. 광해군과 대북파의 정적제거
2. 칠서의 옥(七庶-獄)과 계축옥사(癸丑獄事)
3. 대북파의 능창군 제거작업
Ⅴ 광해군의 정치
1. 명 ․ 청 교체기
2. 중립외교
Ⅵ 서인의 등장
Ⅶ 인조반정
1. 반정모의
2. 반정의 전개
3. 반정의 명분
4. 반정결과
Ⅷ 결론
본문내용
왕세자 자리를 놓고 선조의 14왕자 중 막내이며 유일한 정궁 소생인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충돌하는 당파 싸움이 일어나던 때였다. 영창대군은 정궁 소생이어서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영의정 유영경 등과 비밀리에 논의하였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는 광해군이 서자인데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 고명도 받지 못했다면서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 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 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버린다. 이 후 이 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 을 간언하지만 선조는 미처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게 된다. 인목대비는 선조가 죽은 다음날 광해군을 즉위시켰다.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오늘날의 덕수궁)의 서청에서 보위에 올랐다. 1592년 4월 전격적으로 왕세자로 지명된 지 16년 만의 일이었다. 전쟁의 발발과 종식, 부왕 선조와의 갈등, 명 조정과의 줄다리기 등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전전긍긍의 세월이었다. 그런데 인목대비는 왜 선조의 죽음 직후 이처럼 신속하게 광해군을 보위에 올렸을까?
참고 자료
선비의 배반, 박성순, 고즈윈, 2004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한명기 역사비평사. 2003
정인홍과 광해군, 조여항, 동녘, 2001
조선왕조사1, 이성무, 동방미디어, 1999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 , 한명기, 역사비평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