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문인적 면모
- 최초 등록일
- 2006.11.22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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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Ⅱ본론
Ⅲ결론
본문내용
사마천은 중국 고대의 진보적 사학가 중에서도 걸출한 대표 격이다. 그의『사기』는 3000년 동안을 관통하는 통하였으며 그는 이로써 기전체의 사서체제를 확립했고 고금을 관통하는 통사의 저작을 개시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인민성과 사상성은 후대의 진보적 사학가에 자양분을 공급하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마천(B.C. 145~?)의 자(字)는 자장(子長)이다. 그 스스로, “사마천은 용문(龍門)에서 출생하여 황하 북쪽 산의 남쪽에서 농사짓고 목축했다”고 했으니, 전한의 좌풍익(左馮翊) 하양(夏陽, 지금의 陝西 韓城)사람이다. 그 생졸 연월에 관한 기록은 명확치 않지만 왕국유(王國維)의 저작『태사공행년고(太史公行年考)』에서는 사마천이 한(漢)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B.C. 145) 출생이어야 마땅하다고 간주하고 있으며, 졸년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체로 무제와 생졸년이 비슷해서 60세 전후로 보고 있다.
사마천의 선조들은 모두 관리가 되었지만 그 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고 사마천 자신이 경작과 목축에 참여하고 있었던 만큼 그는 중소지주 가정의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전한의 태사령(太史令)이었다. 질(秩) 600석이던 태사령의 관위는 높지 않았으나 문서, 역사기록, 천문관측 등의 업무를 관장하면서 ‘석실금궤(石室金匱)의 서적’즉 국가도서관 소장의 장서와 문서 등을 볼 수 있었고 또한 “조정의 의정과정의 말석에 참여함”으로써 국가대사도 알 수 있었다. “일찍이 천문학을 당도(唐都)로부터 배웠고『역경』을 양하(楊何)에 게서 전수받았으며 도(道)에 관한 이론은 황생(黃生)으로부터 배웠던”사마담 자신은, 자연철학, 역사학 모두에 대해 연구했던 학자였다. 사마담의 저술『논6가요지(論六家要指)』에서는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치도(治道)에 관한 학설들을 분석했는데,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등에는 장단점이 있으며 도가만이 각각의 장점을 겸비하고 그 단점은 버리고 있다고 여겼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