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수용
- 최초 등록일
- 2006.12.02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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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리학의 수용과 관련하여 당시 시대적 정황과 수용배경을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먼저 원간섭기 사서집주의 이해와 성리학 수용부분을 참고하여 보자면 성리학 수용이후 맹자의 경세론이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훨씬 활용되어지고 있고 송대의 성리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맹자가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단비판과 도통론, 경세제민론,군주론이 활용되고 있다.
고려 중기의 맹자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제한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예종 4년 7재나 국자감의 교육과정이나 예종,인종년간의 경연강의에 맹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국가적인 경서로 맹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또한 고려중기에는 맹자의 이단 비판과 정전제 항산론과 수기치인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불도 삼교의 병존적 고려 사상계분위기에서는 맹자의 이단론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또한 고려중기에는 맹자의 경세론이 활용되지 않았는데 맹자가 말하는 치자의 사명의식이나 대민시책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긴 힘들다.
성리학 수용이후 성리학을 익힌 사대부는 당연지사로서 천리를 내세워 군신,부자,천자-제후관계를 예로 들어 지배관계를 옹호하는 논리로 내세웠다. 이는 성리학의 명분을 중시하는 성격을 보여주는 예이다.
사서를 통하여 이단설을 수용하여 유학이외의 사상을 이단으로 인식하였지만 사회전반적인 불교분위기에 입각하여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또한 유불도 삼교의 조화적 분위기속에서 성리학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대립적인 입장보다는 유사점에 관심을 보이며 불교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 이곡은 유교의 호생지덕과 불살지계는 같은 자비라고 하였다.
이를 정리하여 보자면 성리학을 수용한 사대부는 불교배척의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불교에 대한 배척은 지배질서 혹은 원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요소로 받아들여 질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맹자의 이단론은 인식에 그쳤을뿐 현실에는 반영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각종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