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사상가-안창호
- 최초 등록일
- 2006.12.04
- 최종 저작일
- 2006.05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소개글
교육사상가 연구를 통한 교사상 정립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연구및 고찰>
목차
1. 서론
2. 본론
(1) 생애(1878~1938)
(2) 안창호의 교육사상
1) 교육의 이념과 목적
2) 교육목표
3) 교육활동
3. 결론 및 내가 발견한 교사상
본문내용
1. 서론
교육사상가 연구라. 어떤 분을 연구해 보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현대교육사상까페에 들어가서 예전에 올려진 과제들을 살펴보았다. 외국의 교육사상가들을 정리한 자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요즘 그 분에 대한 책도 읽고 있어서 안창호 선생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2. 본론
(1) 생애(1878~1938)
호는 도산(島山)으로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구세학당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 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를 만들어 《공립신보》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하여《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 산업 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 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를 창간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