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후사가의 문학
- 최초 등록일
- 2006.12.07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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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실학자로 유명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이상 후사가)의 문학세계와 그 특징에 관해 쓴 발표문입니다. 분량은 많지 않으나 교수님으로부터 참신하고 요약이 잘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목차
1. 들어가며 - 조선후기 시단의 변화와 후사가의 등장
2. 후사가의 문학세계
2.1 후사가의 사상적 전제
2.2 후사가의 시문관
2.3 후사가의 문자인식
2.4 후사가 시의 제재
3. 맺으며
* 후사가의 한시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조선후기 시단의 변화와 후사가의 등장
壬丙 兩亂 이후 肅宗代에 이르는 70여 년간의 시단은 문자 그대로 적막과 황량 그대로다. 숙종 연간에 이르러 모처럼 외환으로부터 안정을 되찾아가면서 騷壇의 안정을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시대 詩壇의 내부에는 한 시대의 특성으로 기록될만한 사상들이 조처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특히 새로운 계층이 문학의 저작자 또는 향유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300년간 시단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해 온 사대부 반열에 참여하지 못한, 이른바 閭巷人들이 등장하여 혹은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시세계를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 그 첫 번째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민중들 또한 민중의식의 성장과 함께 문학의 적극적인 향유층으로 등장하였다.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시단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金昌協 등은 당시 시단의 風尙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는 이른바 眞詩運動을 주창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유가의 상식을 뛰어넘어 그들 주변에 있는 자연, 인물, 풍속 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朝鮮詩의 眞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타고난 신분은 庶流이지만 사대부와의 교유를 통하여 시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일군의 시인이 있다. 이른바, 後四家 朝鮮後期 英祖時代의 李德懋, 柳得恭, 朴齊家, 李書九의 4인을 하나로 묶어 後四家 또는 漢詩四家라 부르기도 한다. 朝鮮中期의 漢文四大家와 대칭되는 호칭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으나, 漢文四大家는 문장으로 한 시대에 이름을 드날린 조선중기의 대표적 문장가이고, 이른바 後四家는 조선후기 騷壇의 대표적 詩人群으로 推崇된 이름이 아니다. 餘他 시인들과의 辨別的 便宜를 위하여 4인의 동호인 그룹을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들 4인은 白塔을 중심으로 隣近에 起居 交遊하면서 2∙30대의 젊은 시절의 詩作들을《韓客巾衍集》편성하여 淸朝의 문사들에게 評價를 구했던 것을 후일(1970년) 《箋主 四家詩》로 간행하면서 四家란 이름이 붓 끝에 오르기 시작했다.
로 알려진 李德懋, 柳得恭, 朴齊家, 李書九 이서구는 비록 출신은 양반 적자이나 시의 성향이나 이념적 성향을 고려해 볼 때 이들과 같은 범주에 넣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朴趾源, 洪大容 등의 門庭을 출입하면서 그들의 입지를 사대부의 권역까지 확장하는가 하면, 庶流라는 동류의식이 쉽사리 동호인활동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韓客巾衍集》과 같은 공동시집의 편성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들은 어쩔 수 없는 生得的 地位 때문에 그들의 사회적 진출에는 일정한 제한이 가해졌지만, 반면에 이들은 일반 사대부들과는 구별되는 사회적 규범과 생활권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문학의 향유방식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後四家의 詩史的 位相」 민병수
「朝鮮後期 漢詩의 새로운 傾向에 대하여」 민병수
「朝鮮朝 後期四家詩에 있어서 實學思想의 檢討」 宋寯鎬
『朝鮮後期漢文學作家論』 鄭良婉 外 共著
『朝鮮朝後期 漢詩硏究』 鄭良婉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