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동래성의 항전
- 최초 등록일
- 2006.12.08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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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592년 4월 13일. 부산은 왜군의 침략으로 전화에 휩싸인다. 바로 임진왜란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부산포진, 동래를 거쳐 전국적으로 커지게 된다. 부산은 우리나라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최초의 격전지가 되었으며, 7년간 이어진 일본군의 주둔으로 가장 오랫동안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의 옛 조상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부산사람들의 일본 침략에 대한 저항의 기운은 매우 드세었다. 부산사람들은 군민이 합심해서 필사적으로 항전했고 이는 전국적인 의병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임진왜란 개전 초기의 전쟁 중에서 동래성의 항전을 살펴보고 어떤 교훈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목차
서론
본론
1)동래성과 송상현
2)송상현의 일생
3)동래성 전투의 양상
4)이후 동래 부민의 항전활동
결어
참고문헌
♣참고문헌♣
본문내용
≪序論≫
1592년 4월 13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부산은 왜군의 침략으로 전화에 휩싸인다. 바로 임진왜란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부산포진, 동래를 거쳐 전국적으로 커지게 된다. 부산은 우리나라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최초의 격전지가 되었으며, 7년간 이어진 일본군의 주둔으로 가장 오랫동안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의 옛 조상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부산사람들의 일본 침략에 대한 저항의 기운은 매우 드세었다. 부산사람들은 군민이 합심해서 필사적으로 항전했고 이는 전국적인 의병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임진왜란 개전 초기의 전쟁 중에서 동래성의 항전을 살펴보고 어떤 교훈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本論≫
1)동래성과 송상현
동래라는 지명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유래하여 임진왜란 때 행정 군사의 중심지로 부산을 대표하는 지명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는 도호부였다. 선초에 동래는 현이었으나, 명종 때 도호부로 승격되어 정 3품 당상관인 문관출신으로 수령을 임명했다. 이는 일본 사신의 접대를 위해 의주와 동격으로 수령을 임명한 것이다. 즉 정부에서는 일본을 의식해 동래성을 최전선의 방위 체제로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란 1년 전 송상현(宋象賢)이 동래부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송상현은 문인출신이지만 군사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관계로 부임하면서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동시에 수성방어체계를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동래성 전투는 육전에서 전개된 임진왜란의 첫 전투라 할 수 있다. 왜군의 주장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끼나가)이 이끄는 대병력을 맞아 제승방략 자연향촌단위의 군사를 군사거점이나 집결지에 모은 뒤, 서울의 장수가 내려와 이들을 지휘하는 방식.
의 분군법과 진관체제 전국 행정단위의 하나인 읍을 군사 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해 그 크기에 따라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각 읍의 수령이 군사 지휘권을 겸하게 하는 것.
의 군사방어 지휘계통에 따라 경상감사 김수, 좌병사 이각 등이 병력을 이끌고 신속하게 동래성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적병의 기세에 겁먹은 감사와 병사가 도망을 가자 동래부사 송상현을 중심으로 하여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함, 조방장 홍윤관 등은 추호의 흔들림 없이 군민과 함께 최후의 마지막까지 당당하게 왜군에 대항해 순국했다.
참고 자료
1. 임진왜란기 영남의병연구, 최효식, 국학자료원, 2003
2.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최효식, 국학자료원, 2004
3. 시민을 위한 부산의 역사, 부경역사연구소, 도서출판 선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