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철학]사상가 연구 - 율곡 이이
- 최초 등록일
- 2006.12.16
- 최종 저작일
-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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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상가 연구 - 율곡 이이
목차
1.. 생애 - 생애, 업적 본받을 점
2. 사상 - 사상, 교육사상, 철학사상
3. 격몽요결
4. 맺음말
본문내용
- 업적, 본받을 점
공직자로서 이이는 동서붕당의 조정을 위해 노력하였고, 국방력 강화를 위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회경장론 - 제도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부정부패가 없는 깨끗한 공직생활을 했다고 한다.
교육자로서 이이는 교육에서 항상 입지(立志)를 강조해 자경문, 성학집요, 격몽요결, 학교모범에서 항상 뜻을 세우기에 힘썼다. 또한 은병정사(소현서원)를 세우고 많은 제자를 가르쳤는데 문인록에 보면 85명이 기록되어있다. 이에 따라 격몽요결(42세), 소학집주(44세), 학교모범(47세) 등 교육에 관한 명저를 남기었다.
문학자로서 이이는 고산구곡가 등 많은 시를 남기었다.
사상가로서 이이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고, 조선 후기 실학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생활인으로서 이이는 향약을 실시하여 사회교육에 힘써 해주3약(해주향약, 해주일향약속, 사창계약속), 서원향약등을 남겼다.
또한 효성이 극진하며, 100여명에 이르는 일가친척이 동거계사를 만들어 함께 생활하면서 모범적인 가족의 모습을 보여줬다.
2 사상
- 사상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교육과 정치의 중심사상이 되면서 불교, 도교에 대한 배척이 심하였다. 조선의 개국 초기에 정도전은 `불씨잡변` 등을 통하여 불교와 도교를 강하게 배척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특히 퇴계의 불교와 도교 그리고 양명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영향으로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오직 유교(주자학)을 금과옥조로 삼아 여기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결국 조선시대의 사상은 대부분이 주자학에 치우쳐 사상의 폭이 넓지 못하고 외형적으로 볼 때 너무나 단조로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율곡은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유학만을 연구하지 않고 불교, 도교, 양명학 등을 두루 연구하였다. 이러한 율곡의 개방적인 학문태도는 사상의 폭을 넓혀서 퇴계와 쌍벽을 이루어 우리나라의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키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