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조식선생의 일대기 및 유학사상의 특징
- 최초 등록일
- 2006.12.25
- 최종 저작일
- 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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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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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1. 남명 조식선생의 생애
2. 남명 조식의 유학사상의 특징
3. 남명은 남명, 퇴계는 퇴계
결론
본문내용
고려말에 수입된 중국의 성리학은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 그 연구가 매우 활발하였으며 각 지역별로 뛰어난 학자들이 속출되어 독특한 학풍과 학맥을 형성하였다. 조선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율곡 이이 등에 의하여 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이 중 특히 퇴계와 남명의 성리학은 주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영남학파로 일컬어졌으며, 이들이 영남의 양대학맥을 이끌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퇴계 이황(1501~1570)은 학계는 물론 정계에도 진출하여 많은 업적과 역량을 발휘하여 조야에서 존경을 받았고, 또한 후세에도 그에 대한 연구로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조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비해 남명 조식(1501~1572)은 조선조 사상사에 지대한 공적을 끼쳤음에도, 몇 가지 요인에 의해 올바르게 조명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 까지도 그 연구가 미흡하다.
그 이유는 첫째, 남명 자신이 저술에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문이 임진왜란 중에 대부분 소실되어, 후세에 전하는 것의 양이 많지 않은 점, 둘째, 남명은 영남사림파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여 하학 위주의 실천적 학풍을 수립하고 퇴계류의 이론지향적 경향을 비판하였으나, 이후 조선 유학계의 주조가 후자의 방향으로 흘러간 점, 셋째, 퇴계가 남명을 당대 남화지학의 영수로 간주하고, 또한 그의 문장과 출처가 중용의 도에서 벗어남을 비판한 이래, 남명의 학문을 이단시하는 경향이 대두된 점, 넷째, 당시의 정치 현실과 국왕을 직설적으로 신랄히 비판하여 조정으로부터 경원시된 점, 다섯째, 신도비의 시비로 인한 유림과의 이반된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특히 남명학파의 쇠퇴에 치명적인 요인은 인조반정의 성공과 그에 따른 래암 정인홍(1536~1623)의 실각과 학파의 폐퇴라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남명학파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거의 퇴계학파에 통합되다시피 되었다. 그 같은 행태는 우도유림의 사족으로서의 명맥 유지를 위해서 필연적 추세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영조 4년(1728)의 무신난(이인좌․정희량의 난)으로 말미암아 우도는 또 한 차례의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최후의 남인 영수였던 번암 채제공(1720~1799)이 졸한 이후로 이 학파는 거의 완전히 후원자를 잃게 되어 더욱 깊은 어둠 속에 묻히게 되었다.
참고 자료
[교감국역남명집], 남명학연구소. 1995.
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1995
손병욱, [조식의 인물과 학문사상]
강동욱, [남명의 숨결]
신충행, [삼동에 베옷입고], -남명 조식 생애 전기-
수업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