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의 생애와 사상연구
- 최초 등록일
- 2006.12.26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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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길준의 생애 중 미국 유학 시절과 연금시절인 초기 유길준의 생애를 다룬 글입니다. 서유견문을 쓰기 전까지의 유길준의 사상에 대해 주로 살펴본 글로 서유견문에 대한 내용을 다루지 않았지만 초기 유길준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에겐 좋은 글일 것입니다.
목차
시작하며
유길준의 유년시절
미국유학 시절
연금생활
마치며
본문내용
시 작 하 며
1976년 조선과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이 맺어진 이후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기까지 조선의 정치를 한 단어로 평가하자면 실패로 설명할 수 있다. 비록 근대적 개혁정책도 실시되었고, 계몽운동도 이루어졌으며 의병운동도 펼쳐졌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반근대 정책과 부패한 관리들의 이기적인 행태, 외세의 압박에 대응하기엔 다소 벅찼었다. 유길준과 같은 개혁정치가들의 활동도 그 궤를 같이한다. 유길준은 당시 조선사회에서 근대적인 사상을 지닌 소수의 인물이었다. 일본유학과 미국유학을 거치며 서양의 사상에 대해 학습한 그에게 조선사회의 변화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서유견문』은 그의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난 책이었다.
이 글에서는 유길준의 젊은 시절을 주로 다룰 것이다. 특히 유학시절을 거치면서 당시 조선 사람과 다른 사상을 갖게 되는 배경과, 유학을 마치고 본격적인 정치적 활동을 펼치기 이전까지의 행동을 살펴 볼 것이다.
유길준의 유년시절
유길준은 1856년 10월 24일 서울의 양반 동네인 북촌 계동에서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가 속한 기계 유씨 가문은 조선왕조 중반기에 노론계 명문화족으로 명성을 떨치다가 1800년 이후 세도 정치기에 접어들면서 정치적으로 실세하였다. 유길준이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 유치홍은 경상도 예천 군수를 지내고 있었으나 청송 부사직을 끝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났고, 아버지 유진수는 사마시에 합격하여 중년까지 말직인 종9품의 참봉 벼슬밖에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명문화족이었던 가문의 배경이 유길준이 보다 정치중심에 스며들 수 있던 요소였던 것은 분명하다. 조선의 양반 관료 체제에서 득세하려면 당연히 과거를 거쳐야 했으므로 유길준은 여느 양반 자제와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밑에서 과거 시험 준비를 위한 한학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후 유만주가 운영하는 낙산서재에서 공부하는 동안 유길준은 민영익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 때 맺어진 관계는 그 뒤 유길준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게 약 10년에 걸친 유년기의 전통 교육을 통해 유길준은 유교적 교양을 체득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서유견문』, 유길준, 허경진 역, 서해문집, 2004
『문명의 정치사상 - 유길준과 근대한국』, 정용화, 문학과지성사, 2004
「유길준과 개화의 꿈」, 김태익, 조선일보 1994.11.8~11.18
「제61편 근대 유학생 1호, 유길준」, KBS역사스페셜, 2006.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