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역사편찬과 역사인식
- 최초 등록일
- 2006.12.26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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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사/ 고려사 절요/ 동국사략/ 동국통감/ 등 각 역사서에서 나타나는 역사인식에 관한 다른 견해에 관한 글로 15서ㅔ기 에서 19세기까지의 역사인식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조선시대의 편사정신은 성리학을 근본으로하여 과거의 역사를 정리하고, 정치적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이다. 그러기에 역사서술과 인식에서 상대적인 진보성과 과학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왜란과 호란의 국난을 경험으로 민족적 자아의식이 크게 성장하여 조선후기에 사서의 편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18시기 후반 이후로는 성리학에서 독립하여 역사서술의 고증적 방법이 심화하고 역사주체를 넓혀가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학의 새로운 면은 개항 후 새롭게 수용되는 근대 서양의 역사학과 접목되어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을 수립하는 모체가 된 것이다. 이러한 큰 흐름을 염두에 두고 조선시대 역사학의 전개과정을 시기별로 정리하고자 한다.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15세기는 고려와 다른 통치질서를 확립하는 역할의 국가사업으로 사서(史書)들이 편찬되었다. 그 첫째가 고려시대의 역사정리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간행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고려전기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무신란 이후의 고려말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조선왕조 창립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구조에 대해 『고려사』는 군주의 절대적 영향력을 중심에 두고 고려역사를 정리하였고 『고려사절요』는 대신의 역할과 관료제도의 정비를 역사발전의 핵심으로 보았다는 시각차이를 두고 간행되었다. 이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갈등은 조선왕조의 권력구조가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한 성종대에 와서 조정되면서 『동국통감』의 고려시대 서술로 마무리 되었다.
둘째로는 고대사의 정리다. 고대사는 불교나 신화 등 종교와 신비주의 ․ 여러국가들의 난립으로 그 계통을 잡는 것이 어려웠다. 태종때 권근 등에 의해 『동국사략』이 나타났는데 이는 성리학이 깊이 투영된 사서로 불교나 신화 등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삼국의 역사를 신라 위주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3조선(三朝鮮)과 3한(三韓)을 삼국이전에 위치시켜 상고사체계의 혼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세종때 『동국사략』은 『동국세년가』로 재정리되었는데 이는 우리 역사를 좀 더 단일민족사에 가깝게 인식하고 세종의 역사인식이 많이 투영되었다. 또한 『동국사략』에 비해 성리학적 명분론에 유연성도 보이고 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더욱 일탈하여 고대사를 긍정적․적극적으로 인식하려는 시도는 세조때 『동국통감』의 편찬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유신(儒臣)들의 반발로 동국통감의 편찬사업은 미수로 그쳤으나 세조의 의도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응제시주』와 성종 7년에 『삼국사절요』가 간행되었다. 『응제시주』는 유자들이 일반적으로 회피하는 자료들을 인용해 단군을 비롯한 역대 개국시조에 얽힌 설화들을 빠짐없이 수록하고, 종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주장을 펴고 있다. 『삼국사절요』는 성리학적 명분론이 강하게 반영된 사서도 아니고 탈성리학적 사서도 아닌 중간 형태로 신화, 전설들을 상세히 서술하고 삼국을 서술함에 신라를 위주로 하지 않고 ‘삼국균전론’을 내세워 성리학적 역사서술태도와도 거리가 있다. 성종 15년에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동국통감』을 편찬하여 비로소 성종 16년에 완성하였다. 이 책은 훈신과 사림의 두 정치세력의 상반된 역사의식을 조종하면서 하나의 역사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15세기의 대표 사서이고, 태조 때부터 진통을 겪어온 관찬사서 편찬사업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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