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왕권강화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6.12.27
- 최종 저작일
- 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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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초 왕권강화에 대한 레포트
목차
Ⅰ. 머리말
Ⅱ. 朝鮮의 建國과 中央集權化 政策
Ⅲ. 朝鮮初期의 王權 强化策
1. 太祖 이성계의 王權 强化策
2. 太宗 이방헌의 王權 强化策
(1) 外戚勢力과 功臣의 除去
(2) 私兵革罷와 軍權掌握
(3) 國王中心 政治體制로의 轉換
3. 世宗 集權期의 王權 强化策
(1)集賢殿의 설치
(2)4군 6진의 개척
(3)訓民正音의 창제
(4)대마도 정벌
4. 조선왕조의 체제를 완성한 成宗
Ⅳ. 맺음말
본문내용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신흥사대부와 손을 잡고 전 왕조(고려)를 무려트리고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500여년동안 지속된 왕조이다. 고려 말 국내 상황은 정치적으로 昏亂하였다. 왕의 힘이 약해지고 귀족들이 부패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또 외적의 침임이 많아지자 이들을 막는 장군의 힘이 커지게 되었다. 이성계 또한 이 당시 무인으로서 큰 힘을 키웠던 인물이다. 대외적으로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또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 말에는 고려라는 사회가 점점 멍들어가고 있었고 새로운 권력자와 새로운 왕조의 출현의 기운이 돌았다. 조선의 건국과정의 직접적인 배경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들 수 있다. 고려 시대 끝 무렵에 공민왕은 그 동안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쌍성총관부(지금의 평안도와 함경도 일부)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러자 새로 일어난 명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고 ‘철령 위’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최영등은 이를 거절하고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지방까지 되찾기 위해 군사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요동 공격을 반대하던 이성계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떠나던 도중 정벌의 무모함을 주장하고 회군하였다.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 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새로운 왕조를 세우겠다는 이성계의 야심을 엿 볼 수 있다.
이성계와 그의 세력을 지지하는 신흥사대부들은 위화도 회군 후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작업을 착수 하게 된다. 우선 자신의 반대 세력들을 물리쳐야 했다. 그래서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를 비롯한 溫乾改化파 세력들을 몰아냈다. 정몽주는 고려 말 고려의 개혁을 주장한 인물로 처음에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후에 이성계 일파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그는 고려의 신하이므로 고려를 개혁하여 바른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마음을 떠 보았으나 고려를 지키려는 그의 마음이 변치 않아 선죽교에서 죽였다. 이성계는 반대세력들을 제거하고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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