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백년전쟁의 원인과 결과
- 최초 등록일
- 2007.01.09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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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년전쟁의 원인과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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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중세사회는 아직까지는 프로테스탄트(크리스트교중심)가 나타나지않은 카톨릭의 보편성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정치적인면에서 왕보다는 교황이 중심이 되고, 경제, 사회적면에서 봉건장원제하(브레이브하트에서 감상한바와같이)의 토지를 매개로한 농노보다 영주, 기사중심의 사회였다. 그러나 중세말에는 이러한 교황을 중심으로한 카톨릭중심의 사회가 십자군원정으로 인한 기사세력의 몰락, 성경적이지않은 면죄부판매로인해 종교의 문제점이 대두되어 중세사회가 불안해졌다.
게르만, 마자르, 바이킹족의 이동으로 로마가 멸망하고, 10C이후에는 사회가 안정되어 장원제가 정착하게된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장원이 안정됨에 따라 전쟁이 줄어들게 되었는데, 한편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토지수급이 원만하지 못하여 잉여자원의 개발이 원거리 도시원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도시가 발달하고, 교통로가 통과하는 지역의 자급자족적인 장원이 붕괴되어 지방분권적인 영주세력이 약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이 십자군원정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교황도 권위에 도전을 받게 된다.
이러한 교황세력의 약화와 그에 따른 절대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황제세력의 부각속에서 100년 전쟁을 이해하면 된다. 황제권의 강화로 중앙집권적 국가화가 되고, 절대주의(Absolutism)이 가 대두되어 근대사회로 나가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인 100년 전쟁(1337-1453)의 직접적 원인은 프랑스왕이 죽음으로 인한 왕위계승문제이다. 영국은 1066년 노르만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 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 공급을 중단하고, 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으며,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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