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예안진성이씨 이황가> 조발표했던 레포트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가문의 형성기
Ⅲ. 가문의 번성기
1. 가문의 배경과 대표인물
2. 가문의 결속
3. 가문의 위선사업
Ⅳ. 가문의 사회상
1. 불천위제사
2. 16세기 진성이씨 농장
3. 친족관계의 변화
4. 영남만인소
Ⅴ. 가문의 현재
Ⅵ.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조선조에 있어서 문중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 집단으로써 사회구성과 발전에 있어서 중추적 기능을 하였다. 문중은 조선조 지방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조에 있어서 문중 조직은 통상 17C부터 잘 나타나고 있는데, 형성의 기운은 이미 조선 전기부터 있어왔다. 조선초기의 신진사대부들이 제시한 성리학 이념은 조선전기에 국가 통치조직 등에서부터 적용되어 나갔으며, 지방에 있어서는 부계혈연집단인 문중이 형성되는데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이후 성리학적 이념이 점차 조선사회에 확산되면서 사회적으로는 종통(宗統)을 중시하는 문화가 나타나고 기존의 전통적 이념과 절충, 나름대로의 특징적인 문화로 정착되어갔다.
성리학의 적용과정에서 조선사회는 친족조직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소위 양측적 혹은 혈연적 조직에서 부계적 친족조직으로 바뀌어 나아가고 있었다. 이처럼 성리학은 조선사회를 변화시키기고 있었다.
경상도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인 진성이씨가는 조선조 최고 유학자인 이황을 배출한 가문이다. 16세기 후반부터 이황을 중심으로 그 문하에서 많은 학자와 관인이 배출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당대 영남을 대표하는 문중이었다. 그리하여 이 가문을 통해 조선시대의 생활을 엿보고자 한다.
Ⅱ. 가문의 형성기
진성이씨(眞城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추봉밀직사를 지낸 석(碩)이다.
본관인 ‘진성(眞城)’은 ‘진보(眞寶)’를 뜻한다. 원래 진성이씨는 진보 이씨 였다.
‘진보’가 ‘진성’으로 바뀐 것은 퇴계 이황의 숙부인 송재공(松齋公) 이우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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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이씨 종친회 홈페이지- http://www.jinseong.org/coding/main.asp
뉴스 기사- 한국일보,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