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개통을 통한 동서문화 교류
- 최초 등록일
- 2007.01.15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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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사 수업 과제로 서역개통을 통한 동서문화 교류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1. 장건의 서역대장정
2. 서역개통의 의의
3. 서역문물의 동점
본문내용
1. 장건의 서역대장정
전국시대에 일어난 흉노는 한초에 이르러 대부분의 서역제국을 그 통치하에 두었다. 기원전 209년 흉노는 모돈단우가 등극한 후 국력이 급속히 강화되어 대부분의 주변 제민족을 복속시켰고 남으로 중국을 압박해서 황하연안까지 진출해서 한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강력한 흉노의 존재는 한에 대해 일대 위협이 아닐 수 없었고 한초 60년간 국력회복을 위해 한은 흉노에 대해 화친책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100만의 유능한 기마정예병을 보유하고 있는 흉노는 한의 화친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한의 변방을 침범해서 재물을 약탈하고 치하의 서역제국에 막대한 공물과 납세를 강요하는 등 횡포를 자행함으로써 한의 안전을 각방에서 위협하고 한과 서역제국간의 내왕도 방해했다.
그러나 한무제(B.C.140-87)의 등극으로 한과 흉노와의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약관 16세에 등극한 그는 흉노의 부단한 침범에 의분을 표시하면서 선왕들이 못 다한 유업을 달성하기 위해 대흉노강경책을 취하게 되었다. 그가 등극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흉노의 한 투항자로부터 흉노에 의해 멀리 서북방으로 쫓겨 간 대월씨가 흉노에 대한 앙심을 품고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대월씨와 함께 흉노를 동서로 협공할 의중을 굳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월씨와의 동맹결성을 위해 당시 낭위의 지위에 있던 장건을 기원전 138년 대월씨에 사신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장건은 수행원 감부와 함께 100여명을 인솔하고 장안을 떠나 오늘날의 감숙성에 이르렀을 때 더 서진하지 못하고 이미 이 지방까지 남하한 흉노군에 체포되어 흉노에 압송되었다. 그는 흉노에서 흉노여인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보고 10년간을 보내던 중 기회가 생겨 감부, 처와 함께 도주하는데 성공하였다.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을 오매불망하던 그는 서쪽으로 수십일 걸어 드디어 대완, 강거, 대월씨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망을 안고 찾아간 대월씨의 정세에는 그간 변화가 일어났다. 신왕이 나타나 대하를 병합하고 오손을 피하여 이리강으로부터 멀리 서투르키스탄지역으로 서천하여 국태민안의 성기를 맞아 흉노에 대한 공격의향을 이미 포기하고 말았다. 실망한 장건은 대월씨를 떠나 대하에서 1년간 체류하다가 기원전 128년 천산남로를 따라 귀국길에 올랐으나 도중 또다시 흉노에게 재차 체포되어 1년간 다시 구류되었다. 그가 구류된 기간 흉노단우의 죽음을 계기로 발생한 내란을 틈타 도주하여 기원전 126년 드디어 장안에 돌아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