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근대 금융기관
- 최초 등록일
- 2007.01.18
- 최종 저작일
- 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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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천의 근대 금융기관의 역사와 내용에 대해 서술함
목차
1. 개요
2. 초기 인천 일본 은행(일본은행 3지점 시대)
3. 중기 인천 금융계(5은행 지점 시대)
4. 1930년대 인천 금융계
본문내용
1. 개요
1) 배경
- 1883년에 인천해관과 감리서가 설치되고,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 조계들이 설치되기에 이르게 됨.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 일본의 전쟁을 위하여 조선땅을 내준 꼴이 됐으니, 이후 일본군의 군화발이 인천항을 자기 땅처럼 짓밟음.
✼ 1892년,‘일본 밖에서 일본인 손에 의해 이루어진 가장 완벽한 일본책’으로 자평하는 ‘인천사정’이란 책자는 당시 ‘일본 영사관이 일장기를 아주 높게 휘날릴 수 있는 좋은 위치에서 장엄하고 수려하게 인천항을 삼킬 듯 바라보고 있다.’고 써있음. 정말 그들은 인천항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삼켜버렸음. 그 후 우체국, 경찰서, 일본거류지의회, 인천 상법회의소, 무역상조합, 잡화상조합, 영어소학교, 공립소학교, 교토의 본원사(本願寺), 공립병원와 강제병원, 정미소, 제물구락부, 조선신보, 활자소, 그리고 제일국립은행, 제 18국립은행, 제58국립은행, 일한무역상사, 우선주식회사의 일본지점 등이 속속 들어섰 음. 대불호텔과 이태호텔, 수월루 등의 여관도 들어섰다.‘근래 불경기라는 소리가 인천 항의 온 시가를 뒤덮는 데도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花紅柳綠) 흥청대기 이를 데 없 으니 술집에는 어린 소녀들도 많았다.’고 한 기록도 있다. 이로써 유곽이 번창하여 도심 까지 집창촌이 뻗어 나가 항구를 드나드는 뭇사내들을 유혹하였다. 교회도 빠질 수 없 었으니 영국 성공회를 필두로 답동성당, 내리교회 등이 속속 들어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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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없음